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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태엽 May 06. 2020

<액스>(The Ax), 면접 떨어진 날 읽기 좋은 책

20.05.06. 정신 나간 책 리뷰

어떤 영화감독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나만의 개인적인 기준을 둔다. '적어도 그 감독 필모그래피의 90% 이상은 섭렵했다'가 그 조건이다. 물론 이건 오랫동안 다작을 해온 감독(스콜세지, 스필버그 등) 기준이고 작품 수가 적은 감독은 거의 모든 작품을 다 보고 난 후에야 그 감독을 '좋아한다'라고 '말할' 자격이 있다고 혼자 생각하고 있다. 가령 예를 들어서 폴 토마스 앤더슨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어 그러면 <데어 윌 비 블러드> 보셨어요?"라는 질문에 "아니요. 그 감독 영화는 최근에 <팬텀 스레드> 한 편 봤는데 좋아서요."라고 답하면 이상하니까. 적어도 나에겐. 물론 지극히 내 개인적인 기준이고 이 기준을 타인에게 적용하지는 않는다. 자주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깐깐한 사람이 아니다. 그냥 나는 나 스스로가 감히 무언가를 '안다'라고 말하는 기준을 높이고 싶다(이는 겸손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아는 척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근데 이건 아직 영화나 가수 정도까지만 가능하지 다른 분야는 형편없다. 나름 책을 많이 읽었다고 자부하지만 좋아하는 작가를 대라면 이상, 백석, 박준(이들의 공통점은 시인이고 산문, 소설까지 포함해도 작품이 적다는 것) 외에는 거의 대지 못한다(여기에 겨우겨우 장석주 작가 추가). 일단 소설을 잘 안 읽고, 한 작가만 판 경우가 잘 없어서... 굳이 따지자면 (이것도 옛날 기준) 가네시로 가즈키와 조앤 K. 롤링, 기욤 뮈소, 히가시노 게이고 정도다. 아, (거의 모든 작품의 등장인물로 남녀 불문 모델급 키와 미모에 가슴속에 숨겨둔 아픔이 있는 사람들이 나오는) 기욤 뮈소는 빼고 싶다...

이 책 아래의 초록색 책은 로버트 맥키 옹의 시나리오 책이다. 그렇다. 지적 허영심

그래서 도서의 경우, 좋아하는 작가를 대기보단 좋아하는 책을 얘기한다. 오늘은 면접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은 기념으로 다시금 꺼내 읽은 걸작 하나를 소개한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액스>다. X말고 'The Ax'다. 영어에서 'ax'는 도끼라는 의미 말고 해고의 뜻으로도 쓰인다. 우리나라의 '잘렸다'는 표현과 비슷하다. 이 책은 박찬욱 감독이 거의 10년 전부터 영화화하고 싶은 작품이라고 말하고 다녔고 실제로 영화화 시도를 여러 번 했지만 결국은 불발됐다. 내가 이 작품을 알게 된 것도 고등학교 시절 본 어느 잡지에서 박찬욱 감독이 추천하는 작품으로 이 책을 꼽아서였다. 박찬욱 감독은 만약에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영화화한다면 제목은 <모가지>로 하고 싶다고 했다. 프랑스에서 영화화되기도 했다.


이 소설은 1997년에 발간됐다. 발간 시기는 중요하지 않다. 걸작은 세월을 타지 않는 법. 소설의 주인공인 중년 남성인 버크 데보레는 20년 넘게 일한 회사가 캐나다로 합병되며 정리 해고된 지 2년이 됐다. 실업 보호 수당도 다 썼지만 오십이 넘은 그를 받아줄 회사는 없다. 한 집안의 가장이지만 이제는 사실상 무기력한 남편이자 아버지일 뿐이다. 아내와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지고 그도, 아내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심지어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고 있지만 그런 아내의 심경이 이해가 가서 뭐라 하지도 못한다. 모범생이었던 아들은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훔치다가 경찰에 잡히고 심지어 초범도 아니다. 이후의 자세한 내용은 책에서 확인하시길...


지금까지 정도(正道)를 걸어왔던 위기의 중년 남성 버크, 그는 구직 활동을 계속 하지만 자기 나이 때의 전문직(제지 관련) 경력 자리는 뽑는 회사도 드물고 경쟁도 더 심하다. 그래서 그는 결심한다. 그 경쟁률을 본인이 물리적으로 직접 낮추기로. 그는 가짜 구인광고를 내서 자신의 경쟁자들의 이력서를 받고는 자기보다 경쟁력이 높은 사람들을 하나씩 죽여나간다.

 

요즘같이 직장 구하기가 힘든 환경에서, 그 환경에서 일을 구하는 내가, 하필 면접 불합격 통보를 받은 오늘 이 책을 갑자기 떠올리고 글을 쓴다는 게 매우 정신 나간 짓거리로 보일 수 있다. 실제로 글을 쓰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라는 게 무엇인가. 픽션이라는 게 무엇인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고 대리만족(?)도 시켜주는 게 픽션 아닌가? 서울로 올라오면서 많은 책들을 다 고향에 두고 오고 그 후로도 틈틈이 안 읽는 책들은 고향에다 유배시켰지만 이 책은 살아남았다. 걸작이니까. 특히 이런 날에 읽으려고...


*사실 모든 방면에서 정말 죽여주는 소설이다. 그러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읽어보길...

*커버 사진은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이 사진작가 시절 찍었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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