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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태엽 Jul 24. 2019

"I would prefer not to"

바틀비여!

 내 닉네임 '쓰는 이 바틀비'는 당연히도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서 따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바틀비, 그는 저항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무기력한 인간의 상징이다. 그리고 나와 너무 닮아있다. 무기력한 인간이라는 것,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곤 그렇게 안 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뿐이다.

 "I would prefer not to"

 고작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이다. 번역판에 따라 다르게 번역되는데 영어를 직역하자면 "나는 그렇게 안 하는 것을 선호합니다."다. 이 말은 일반적인 "I would not prefer to",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와는 의미가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그는 후자가 제안에 대한 완곡한 거절이라면 전자는 조금 더 직설적이고 자주적이다. '그렇게 하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는 "그렇게 안 하는 것을 선호한다." 보다 수동적이고, 다른 여지를 주는 열린 대답이니까. 일종의 말장난이다.

 이런 식의 저항, '적극적인 거절'은 여전히 지극히 소극적이다. 바틀비의 삶 또한 마찬가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제안을 거절하는 걸 '택'할 뿐, 능동적으로 뭔가를 할 마음도, 의지도 없는 상태다. 하지만 슬프게도 바틀비는 허먼 멜빌이 소설에서 다루는, 그리고 실제의 '현대 사회'에서 그나마 적극적인 인물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신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진 제안에 대한 '적극적인 거절'마저 하지 못하며 살아간다. 바틀비는 수동적인 인간들 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인간인 셈이다.


 뭐 문학적으로 해석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하지만 내 닉네임에 들어간 ‘바틀비’가 적극적인 수동성의 뜻을 담은 것은 아니다. <필경사 바틀비>를 처음 읽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내가 바틀비에서 보고 있는 건 현대인의 무기력이다. 자본주의의 그 거대한 조류 속에서 헤엄치지 않는 것 말고는 저항할 방법이 없는 그 무기력감 말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번역본에 따라 '아, 인간이여!'인 곳도, '아, 인류여!'인 곳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아, 인간이여!'가 조금 더 마음에 든다. 



 몇 주 전에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심각한 무기력에 빠져있었는데 종합사회복지관에서 3주간 사회복지 실습을 하면서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열정과 에너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일종의 ‘발굴’인 셈이다. 물론 실습이 끝나면서 이 에너지는 급격히 사라질 기미를 보이고 있다. 다시 바틀비가 되기 전에 할 일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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