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3월 7일에 썼던 글
노트북이 고장 나서 다른 중고 노트북을 구했는데 기존 노트북의 자료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예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한번 보게 됐다. 그중 올리고 싶은 글 하나
오늘은 작가 기형도의 30주기다. 그가 사망할 당시는 첫 시집이 출간되기도 전이었다. 작가는 만 29살이 되기 직전에 요절했으니 그의 이름이 실제 생보다 더 오래 산 셈이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형도가 관통하지 않은 젊음은 없다.
(고인(故人)에 대한 어떠한 모독의 의도도 담지 않으려 했다)
기형도는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신화적인 인물이다. 그 특유의 어둡고 우울하지만 서정적인 감성을 담고 있는 문체, 젊음의 불안과 방황이 담긴 작품들도 그 이유에 해당하지만 아무래도 그의 신화를 완성시킨 건 요절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첫 시집이 출간되기도 전에, 생일을 며칠 앞둔 만 28세(한국 나이 30살)에 급사했고, 신화가 되었다. 제임스 딘, 리버 피닉스, 커트 코베인처럼 청춘의 아이콘으로 남은 것이다.
물론 요절한 작가가 기형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일제시대의 이상과 윤동주가 있다. 두 작가 또한 물론 신화적 존재이며 이 작가들의 위대함에 대해서 비교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상과 윤동주의 방황과 불안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에 크게 근거하고 있다(적어도 현대에서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기형도 역시 근현대사의 격동 속에 있었던 건 마찬가지지만 위 두 작가의 시대와는 차이가 크다. 89년은 일단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긴 하니까. 또한 병원과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한 두 작가와는 다르게 기형도는 극장에서 영화 상영 중 말 그대로 급사했다. 시간상으로 훨씬 현대의 인물의 여러모로 의문 가득한 요절은 그의 신비성을 더하는 요소가 되었다.
뜬금없이 영화 <뽕2>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려 한다. 기형도는 예상이나 했을까. 자신이 이렇게 신화적 존재가 될 줄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기형도가 사망 당시에 관람하던 영화는 바로 <뽕2>였다. 신화적 인물의 마지막을 함께한 영화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다. 그의 지인들은 그가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본인도 자신이 그 영화를 보는 중에 사망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작품이 이렇게 유명해질지 몰랐거나. 기형도가 왜 하필 그 새벽 시간에, 왜 하필 동성애자들이 만나는 공간이었던 파고다 극장에서, 왜 하필 에로 영화 <뽕2>를 보고 있었는지는 큰 이야깃거리를 불렀다. 만약에 사후세계가 있다면 작가는 자신이 이런 거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걸 보고 답답해하지 않을까 싶다.
기형도의 시간은 1989년 3월 7일에 멈췄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올해 예순 살이 되었을 건데, 그랬다면 그의 작품은 어땠을까. 말론 브란도는 제임스 딘과 함께 청춘과 반항의 아이콘이었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대배우로 남았다(그의 논란들은 제쳐두자). 기형도는 말론 브란도가 되었을까, 아니면 반짝 떴다가 점점 빛을 잃어 모두에게 잊혀진 사람 중 한 명이 됐을까. 아무도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그 모습을 상상해 볼 뿐이다.
*기형도는 1984년 10월, 그러니까 만 24세에 중앙일보 기자가 되었다. 아직 만 25세인 나는 요즘에 신문사에 이력서를 넣는 중이다.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