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태엽 Nov 02. 2019

이상(李箱)이 쓴 게 아니었던 편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글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32&aid=0002969868&sid1=001

2019년 10월 22일 작성


근래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소식


 내가 모든 글 중에서 가장 애정하는 글은 그 어떤 출판물도 아닌, 작가 이상(李箱)이 최정희에게 쓴 것으로 알려진 연서(戀書)였다.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40723_0013065995&cID=10703&pID=10700#


 개인적으로 연서만큼 그 사람의 감정을 잘 담아내는 글이 없다고 생각한다. 작가들의 일기나 편지를 공개하는 것 자체에 대해 나는 반대하는 편이다. 지나친 사생활에 대한 침해고 고인(故人)에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해서 자신이 쓴 일기가 나중에 모든 사람한테 공개된다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작가의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담겨있는 그런 글을 보는 것이 설레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백미가 이상의 연애편지였다. 이 구구절절하면서 기승전결을 갖춘 채 감정을 자제할 때와 폭발시킬 때를 확실히 알고 있는 편지는 보자마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가 김해경(이상의 본명)이란 인간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한 글이었는데 그게 그가 쓴 게 아니었다니...

 처음엔 충격이었다. 물론 이 사실이 이상에 대한 내 감정을 바꾸게 하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작가 지하련(본명 이현욱)을 새로이 알게 된 것에 감사할 일이다. 또한 도대체 수많은 작가들의 구애를 받은 최정희의 매력이 뭔지 더 궁금해졌다. 

 그리고 분명히 말하건데 성별이 어찌 됐건 간에 우정이 아니라 사랑이 깊게 담긴 글이다.



편지 전문(읽어보면 내가 왜 그리 좋아하는지 알 것이다)


 지금 편지를 받았으나 어쩐지 당신이 내게 준 글이라고는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이 슬픕니다. 당신이 내게 이러한 것을 경험케 하기 벌써 두 번째입니다. 그 한 번이 내 시골 있던 때입니다.


 이런 말 하면 웃을지 모르나 그간 당신은 내게 커다란 고독과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준 사람입니다. 나는 다시금 잘 알 수가 없어지고 이젠 당신이 이상하게 미워지려구까지 합니다.


 혹 나는 당신 앞에 지나친 신경질이었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점점 당신이 멀어지고 있단 것을 어느날 나는 확실히 알았었고…. 그래서 나는 돌아오는 걸음이 말할 수 없이 허전하고 외로웠습니다. 그야말로 모연한 시욋길을 혼자 걸으면서 나는 별 이유도 까닭도 없이 자꾸 눈물이 쏟아지려구 해서 죽을 뻔했습니다.


 집에 오는 길로 나는 당신에게 긴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어린애 같은, 당신 보면 웃을 편지입니다.


"정히야, 나는 네 앞에서 결코 현명한 벗은 못됐었다. 그러나 우리는 즐거웠었다. 내 이제 너와 더불러 즐거웠던 순간을 무덤 속에 가도 잊을 순 없다. 하지만 너는 나처럼 어리석진 않았다. 물론 이러한 너를 나는 나무라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제 네가 따르려는 것 앞에서 네가 복되고 밝기 거울 같기를 빌지도 모른다.


 정히야, 나는 이제 너를 떠나는 슬픔을, 너를 잊을 수 없어 얼마든지 참으려구 한다. 하지만 정히야, 이건 언제라도 좋다. 네가 백발일 때도 좋고 내일이래도 좋다. 만일 네 '마음'이– 흐리고 어리석은 마음이 아니라 네 별보다도 더 또렷하고 하늘보다도 더 높은 네 아름다운 마음이 행여 날 찾거든 혹시 그러한 날이 오거든 너는 부디 내게로 와 다고-. 나는 진정 네가 좋다. 웬일인지 모르겠다. 네 작은 입이 좋고 목덜미가 좋고 볼따구니도 좋다. 나는 이후 남은 세월을 정히야 너를 위해 네가 다시 오기 위해 저 夜空(야공)의 별을 바라보듯 잠잠히 살아가련다…."


 하는 어리석은 수작이었으나 나는 이것을 당신께 보내지 않았습니다. 당신 앞엔 나보다도 기가 차게 현명한 벗이 허다히 있을 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지 나도 당신처럼 약아보려구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 고향은 역시 어리석었던지 내가 글을 쓰겠다면 무척 좋아하던 당신이- 우리 글을 쓰고 서로 즐기고 언제까지나 떠나지 말자고 어린애처럼 속삭이던 기억이 내 마음을 오래도록 언짢게 하는 것을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나는 당신을 위해- 아니 당신이 글을 썼으면 좋겠다구 해서 쓰기로 헌 셈이니까요-.


 당신이 날 만나고 싶다고 했으니 만나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맘도 무한 흩어져 당신 있는 곳엔 잘 가지지가 않습니다.


 금년 마지막 날 오후 다섯 시에 ふるさと(후루사토)라는 집에서 맛나기로 합시다.


 회답주시기 바랍니다. 李弟(이제, 그 전까지는 李箱(이상)이라 적혔다고 여겨졌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19.03.07. 기형도 30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