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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태엽 Apr 29. 2020

애매한 문장력의 저주

20.04.29. 글 쓰는 게 갈수록 더 어려운 사람

 '2 워드 챌린지'는 최소 하루에 글을 하나씩이라도 쓰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나만의 프로젝트다. 오늘은 쓰려고 생각해둔 글이 있어서 그것으로 대체한다.

이제 사진도 내용이랑 별 상관없이 아무거나 내 마음에 드는 거 올리기로 했다.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 중에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는 토니 스타크에게 자신처럼 '지식의 저주'에 걸려 있다(Cursed by knowledge)고 말한다. 대강 설명하자면 지나치게 많이 알아서 해야 할 일(임감)이 늘어나 힘들다는 얘기다.

 다만 여기에도 영화의 번역자 박 모씨의 번역 문제가 있다. 저 표현 자체만 따지면 놀라울 만큼의 직독직해 번역이긴 하지만 문제는 없다. 사실 다른 식으로 번역하기도 이상하긴 하다. 그런데 문제는 '지식의 저주'는 따로 용어로 존재하는 단어란 것.

 여기서 말하는 '지식의 저주'(Curse of Knowledge)는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반응을 예상할 때,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다른 사람도 알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매몰되어 나타나는 인식의 왜곡(cognitive bias)."(출처 : 도서 <상식으로 보는 세상의 법칙 : 경제편>)을 뜻한다. 교수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왜 어려운지를 설명할 때 쓰이기도 한다. "이 정도는 당연히 아는 거 알겠지?"하고 넘어가는 그런 거... 또한 스포츠에서 슈퍼스타였던 선수가 좋은 지도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들에겐 간단했던 걸 가르치는 선수들이 못하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거다. 걔들은 천재였으니까. 리오넬 메시가 "야, 수비가 많으면 이렇게 이렇게 제치고 반 박자 빨리 슛하면 되잖아. 이걸 왜 못해?" 하는 거랑 비슷한 얘기다(물론 슈퍼스타 중에도 훌륭한 지도자가 된 사람이 많다. 사실 선수랑 지도자는 애초에 분야가 다르니까.)

 고로 <인피니티 워>의 번역은 기존에 '지식의 저주'의 개념과는 전혀 상반된 뜻이라 해당 용어를 원래 알던 사람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사실 "가망이 없어"만으로도 노답이었지만.


 사설이 쓸 데 없이 길어지는 내 글답게 서론이 지나치게 길었다. 내가 '지식의 저주'(기존 용어 말고 <인피니티 워> 속 개념) 얘길 꺼낸 이유는 내 얕은 지식의 저주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나의 '애매한 문장력의 저주'에 대해. 이는 쓸 데 없이 많이 읽고 어줍잖게 쓰다가 어휘력도 늘어났고, 다양한 문장의 종류도 익혔으나 그러한 지식 때문에 글 쓰는 게 더 힘든 내 상태를 일컫는다. 방금도 봐라. '말한다'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잠깐 멈춰서 고민하다가 '일컫는다'로 바꿨지 않는가. 사실 이건 정말 기초단계 고민에 불과하고 한 문장을 쓸 때도 어떻게 쓸지, 어떻게 구성할지 드럽게 많이 고민하게 된다.

 6개월 동안 신문사에서 인턴 나부랭이로 일했었다. 그러면서 간결한 글을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지만 '기사체'도 배우고 사용하게 되면서 증상이 훨씬 더 악화됐다. 중증 수준이다. 정말 간단한 문장 하나 쓰는 것도 힘들어진 상황이다. 차라리 조금 모자랐으면 글 쓰는 게 훨씬 더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난 어렸을 때부터 간결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을 쓰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만연체로 글을 썼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볼 때, 간결하면서도 깊은 문장의 경지에 평생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개인적으로는 '간결하면서 깊은 글'이 글쓰기의 최고 난이도라고 생각한다. '간결'과 '깊은'이란 동떨어진 개념이 서로 닿는 것이니 오죽하겠는가. 길고 장황하고 고급 어휘로 이루어진 글은 지적 허영심만 가득 담긴 글이라고 생각하는 바다. 아, 물론 당연히 '복잡하고 깊이 있는 글'을 쓰는 사람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그런 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화려하고 복잡한 문장을 쓰게 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있어 보이기 때문이고, 티가 덜 나기 때문이다. 장황한 글은 포장지를 몇 겹으로 감싸는 것과 비슷해서 척 봤을 때는 그럴듯해 보인다. 실체를 알려면 최소한 포장지를 조금 까보는, 그러니까 글을 몇 문장이라도 직접 읽어봐야 한다. 반면에 간결한 문장은 척 보면 티가 난다. 이 글의 내용이 깊은지, 아니면 '참 재미있었다'나 '또 하고 싶다'로 마무리되는 초등학생 일기의 깊이인지 표가 바로 난다는 얘기다. 그러니 단순하게 따져봐도 어차피 얕을 바엔 차라리 어렵게 포장지로 글을 둘둘 싸매는 게 훨씬 이득이다.

 그런데 내 글에는 그 두 가지 요소가 다 섞여 있다. 간결한 문장은 얕은 게 바로 보이고, 장황한 문장은 읽어보면 별 거 없다. 이러니 내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 갈수록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 양반이 더 대단해 보인다(아 물론 이렇게 말해놓고 사실 헤밍웨이 작품은 <노인과 바다> 말고는 딱히 안 읽어봤다...). 그리고 헤밍웨이가 글 쓸 때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상상도 안 간다. 헤밍웨이가 쉬운 단어로 간결한 글을 쓴다고 생각도 단순하게 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물론 어니스트 헤밍웨이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커다란 사냥총 들고 다니는 마초남이긴 하지만). 복잡한 걸 간결하게 처내는 게 제일 힘든데.

 '2 워드 챌린지'라는 형식의 1일 1문 프로젝트가 나의 말도 안 되는 의지력으로 계속 이어진다면 '하드보일드 챌린지'라도 해봐야 하나. 한 문장에 쓰는 단어 수 제한을 거는 거다. 그러면 아마 어딘가에서 내 글을 읽는(왜 이딴 걸 읽는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매우 감사한) 여러분은 초등학생 일기장 내용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어벤져스 얘기가 자주 나오지. 누가 보면 어벤져스만 보고 사는 줄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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