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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태엽 Feb 08. 2018

인생의 아이러니를 마주한 '이방인'

영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리뷰

 어떤 대상은 관찰하는 행위 자체가 본질을 바꿔버린다. 그래서 현상의 실체를 알아내기가 불가능하다. 관찰하는 행위 자체가 변화를 일으키기에 진실을 알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한다. 관찰을 하면 할수록 더 모르겠는 영화이자 알면 알수록 모르는 주인공에 관한 영화, 코엔 형제의 이 영화 또한 이 ‘불확정성의 원리’에 맞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제목

 이 영화의 원제인 <The Man Who Wasn't There>을 직역하면 ‘그곳에 없는 남자’이다. 그곳이란 무엇일까? 이발소? 주인공은 처음 나레이션을 통해 본인은 이발소에서 일하지만 한 번도 이발사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을 더 넓히면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만 한 번도 존재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방인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는 알베르 까뮈의 책 <이방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에드 크레인’ 또한 ‘뫼르소’와 많이 닮았다. ‘뫼르소’는 자신의 주변에 일어나는 일에 냉소적이며 개인적이고 고립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와 그에 관한 재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라고 느낀다.

 ‘에드 크레인’ 또한 마찬가지다. 이 관련성은 마지막 재판에서 변호사 ‘리든 쉬네이더’의 변론을 통해 명확해지는데 그는 ‘에드 크레인’이 ‘현대인’의 초상이라고 말한다.

 다만 여기서 코엔 형제는 내용을 살짝 비튼다. ‘현대인’이라는 발언 이후 ‘리든 쉬네이더’는 보이는 사실을 보지 말고 사실의 의미를 보라고 하고는 사실에는 의미가 없다는 역설적이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한다. 그리고 갑자기 등장한 ‘프랭크’로 인해 심리는 무효가 된다.


필름 누아르

 이 영화는 필름 누아르적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 흑백 화면과 인물에게 드리워진 그림자 등 기법적 특성뿐만 아니라 중후한 목소리로 나레이션을 하며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가치관을 가진 한 남자가 인생의 변화를 꿈꾸지만 결국은 파국을 치닫는 이야기까지. 팜므파탈이자 주인공이 구원하려는 대상인 ‘버디’라는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필름 누아르의 전형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코엔 형제 영화들의 특징과도 관련이 있다. 전형적인 영화의 패턴을 벗어나게 만드는 돌발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고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 인물이 놓이게 된다. 인물을 결국 사형장으로 이끄는 것 또한 그가 저지른 살인이 아닌 그가 살인한 사람이 저지른 살인 때문이다. 아이러니, 코엔 형제는 이러한 키워드를 끝없이 내포하며 영화를 이끌어간다.


이발사

 주인공은 이발소에서 일하며 잘라도 잘라도 다시 자라는 머리를 끊임없이 깎는다. 그는 자신이 이발사가 아니라 하지만 집에서도 아내의 다리를 면도해주는 신세다. 그는 어느 날 문득 머리를 깎다 끊임없이 자라나는 머리카락에 의문을 가지고 신체의 일부인 머리카락을 자르고 버리는 자신의 존재 자체에도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는 머리카락에게 사형을 고하는 사람인 것이다.

 어차피 잘라질 운명인데 계속 자라는 머리카락의 존재, 머리카락은 심지어 사람이 죽고 나서도 일정기간 자란다. 머리카락은 의미 없이 존재하는 인간 군상이다.

그가 사형당하는 마지막의 사형장 또한 이발소처럼 새하얗고 그것을 지켜보는 참관인들은 그가 영화 초반에 말한 전형적인 아이들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평생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사형시키던 그가 종국에는 자신이 사형시킨 머리 모양을 가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형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아이나 어른이나 인간은 별 차이가 없다는 주인공의 허무주의를 담고 있기도 하다(이것은 처남 ‘프랭크’가 아이들과 같이 파이 먹기 내기를 하는 장면에서 또한 볼 수 있다). 평생 남의 머리를 밀어주고 아내의 다리를 면도하던 그는 최후에 이르러서야 그의 다리를 면도받는다.


담배

 ‘에드 크레인’은 영화 속에서 말 그대로 끊임없이 담배를 피운다. 담배연기는 금세 사라진다. 금방 태워지고 없어질 담배를 끊임없이 피우는 것과 어차피 잘릴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 두 가지는 비슷한 연관성을 가진다. 더군다나 주인공은 이발사다. 그는 끊임없이 존재의 허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인가.

 또한 담배를 계속 피우는 것은 말하기를 거부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끊임없이 수다스러운 인물들과 함께한다. 그는 말이 없고 듣기만 하며 담배를 태운다.

 끊임없이 담배를 태우는 그에게 담배가 금지된 공간은 단 하나다. 바로 ‘버디’의 방. 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담배를 피우는 행위를 제지당한다. 그것은 ‘버디’가 그의 무의미한 삶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유일하게 말을 많이 하는 대상이 ‘버디’이기 때문일까?


불확정성의 원리, UFO

 앞에서도 말한 ‘불확정성의 원리’는 이 영화를 끌고 가는 핵심 키워드다. 관찰할수록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 영화 중반부터 뜬금없이 나타나 반복해서 등장하는 UFO의 이미지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UFO는 이러한 불확실한 세계를 상징하는 기호이다. 또한 UFO는 우리가 본질에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외부적 대상일 수도 있다. 물론 코엔 형제는 UFO의 존재 유무 그 자체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중요한 건 UFO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 또한 실체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UFO는 에드가 사형을 당하기 직전에도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도 결국 삶의 실체에 대해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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