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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열린 Oct 21. 2022

융점 融點

대학 재학 당시, A+을 받은 리포트 때문에 곤욕스러웠던 사소한 기억이 있다.

강의는 교필로 정해진 따분한 과목으로 기억하는데 억지로 들어야 했던 수업이라서 매번 내 집중력은 심해어들이 헤엄치기 적당한 깊이인 수심에 빠져 저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래도 주어진 것은 착실히 해야 한다는 지루한 성격으로 인해 매번 과제는 마감 기한에 맞춰 열과 성을 다해 완수했다.

그때의 리포트 주제는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영화 '밀양'과 기독교의 원죄에 관한 관점을 풀어쓰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오버를 보태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인 '빙점' 또한 같이 엮어서 리포트를 완성했다.

과제를 하면서도 스스로 글을 너무 잘 썼다고 자만 같은 자부를 느꼈는데 역시나, 교수님은 내 리포트 칭찬을 학생들 앞에서 입이 닳도록 하셨다.

뿌듯함을 느낄 새도 없이 단상 앞으로 불려 나갔다.

큼지막하게 A+이란 글씨가 적힌 리포트를 돌려주시며 내게 글을 발표하게 시키셨다.

가뜩이나 5명 이상의 시선이 내게 모이면 속이 울렁거리는 병에 걸린 나에게, 그것도 내 글을 직접 낭독하게 시키다니 이건 점수에 대한 상이 아니라 벌로 느껴졌다.

빼곡히 앉아있는 학생들 앞에서 '내가 쓴 글'을 읽자니 손이 벌벌 떨리고 눈동자도 벌벌 흔들리고 혀도 벌벌 꼬였다. 나는 결국 그 리포트의 내용을 온전히 지 못했고 중간 부분을 잘라서 발표하는 불완전함을 보여줬다. 본인이 채점하며 읽었던 내용과 달라선지 내가 발표하는 내내 교수님은 이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쩔 수 없었다. 내 글을 다 읽어야 했다면, 창피함 때문에 단상 위에 토를 해버리는 수치를 입었을 것이다.



물이 얼기 시작하는 온도, 그 어는 점을 '빙점'이라 부른다.

주목만 받으면 얼굴이 굳어버려도 티 안 내려 아등바등 노력하지만, 도저히 노력만으로 내 몸과 마음이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청중들 앞에서 내 글을 발표하는 순간이 나의 빙점이다. 그때 내 몸은 꽁꽁 얼어버리고 머리가 과부하돼서 혈액순환에도 문제가 생겨버린다. 계절이 한여름이라도 손과 발은 빙하 마냥 차가워져서 모르는 이가 스친다면 뱀파이어로 오해받기 딱일 체온으로 떨어진다.

남들이 나의 글을 읽고 보고 듣는 그 순간이 못 견디게 창피스럽고 낯부끄럽다.

그러고 보니 일기를 대충 쓴다고 혼내키는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께 일기를 검사해서 그렇다고 따박따박 말대꾸한 적도 있다. 결국 내 일기장은 검사용 일기장과 진실용 일기장으로 나누어지게 됐다.



남들 앞에서 글을 발표할 때가 오면, 자긍을 느낀 나의 글들은 수치로 변한다. 스스로 만족한 글이어도 언제나 타인에게 내 글을 뽐내기 부끄러워했다. 마치 목욕탕에서 깨끗하게 때 빼고 광냈다고 나체로 귀가하는 기분이 든달까.

타인이 내 글을 평가한다는 사실도 싫었고 미흡한 실력이 탄로 나는 것도 싫었다. 글이 곧 나의 강점이자 약점인 셈이다.



이제는 시간이 오래 지나서 소설 '빙점'의 줄거리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작가 미우라 아야코가 소설 제목을 왜 '빙점'으로 지었는지 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때 쓴 리포트를 다시 읽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 글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당시 내게 쓴 메일함에 저장해 놓은 것 같았는데 기억의 오류인지 찾을 수가 없다. 지금같이 저장강박증과 동행하는 시기였다면 내가 쓴 모든 리포트는 USB 안에 잠들어있을 텐데 어린 나는 나이만 먹은 내가 이리도 글을 사랑하고 소중히 대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 응모했다.

훌륭한 에세이들의 파도 속에서 내 소설만 두둥실 부유하는 것 같다.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은 건 나의 글쟁이로서의 길이 결국 소설로 매듭지어질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언제나 많았고 나는 글로 자기변명의 기회를 가져야 하는 사람이니 어쩌면 작가가 내 천직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가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린 결정이었다.



처음 브런치에 글을 써 올린 때가 생각난다.

첫 글은 그냥 수필이었는데 너무 한순간의 날 것 같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올려버린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되기도 한다.

글을 쓰고 발행 버튼을 누르기까지 얼마나 달달 떨렸는지.

읽어 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 해도 내 글을 공개하는 행위 자체는 언제나 나를 얼어붙는 한계의 순간까지 몰아붙인다.

그 후에 소설인 '검은 곱슬머리 앤에 대하여'를 올릴 땐 목덜미에서 피가 싸하게 가라앉는 느낌도 들었다.

하기 싫은 일을 재빨리 해치워버리는 심정으로 프롤로그부터 #3편까지 우다다 올려버리고는 노트북을 재빨리 닫아버렸다.

남들이 내 글을 읽는 상황이 닥치면 순간을 모면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싫은 행위를 맞닥뜨리다니 성장한 건지 무모한 건지 모르겠다. 결국에 스스로 글을 공개한 날이 온 것이다.



이번 공모전에 응모하면서 제일 고심했던 점이 있다. 내가 만든 목차를 과연 몇 개까지 올리는지에 대한 소쇄한 고민이 생겼는데 하찮지만 긴요해 보여 그냥 막연히 글을 발행해버리기가 어려웠다.

구성된 꼭지는 40개가 좀 안 됐고 브런치북은 최대 30개의 글을 묶을 수 있으니 30개의 내용을 다 써서 올려버리고 싶은 원대한 마음도 생겼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양은 너무 방대해지고 나조차도 끝없는 스크롤의 벽돌은 외면하는 성격이라 그냥 12개의 챕터에 만족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목차가 40여 개라도 비축해놓은 총알은 아직 15개가 전부라서 글을 다 쓸 시간이 없기도 했다.

제일 고심했던 것 치고는 결국 결과가 정해진 고민이었다. 이 얼마나 쩨쩨한 고민인지.



브런치에 글을 올린 이 결정이 옳은 판단인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얼굴도 모르는 독자들에게 민망한 흑역사가 공개된 것 같고 내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보상 없는 노력'으로 가치가 절하될까 봐 두렵기까지 하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도전에 의의를 둔다는 제일 쉽고도 만족스러운 위로가 있기에 오늘도 글쟁이로서의 길을 나아간다.

내 몸이 어는 빙점의 그 순간이 이제 융점이라는 전환점을 맞이했으니 햇살이 눈을 녹일 만큼 가득히 쏟아졌으면 좋겠다.






Photo by Gary Meuleman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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