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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포선라이즈 May 26. 2021

안과 밖에서

이 글을 안과 밖에서 쓰고 있습니다






1999년이었나,

세기말적인 느낌의 1999년에 나는 수험생이 되었다. 공부를 잘하는 고3이었다. 누구나 그러하듯 나도 스카이를 목표로 했다. 엄마랑 아빠는 먹고살기 바쁘셨고, 나와 동생은 알아서 잘 크고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티브이를 많이 보면 정말 눈이 나빠지는지 모르겠지만 수험생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침침한 도서관에서 한참 동안 공부를 하다 보니 시력이 저하되는 것은 흔한 옵션이었다. 사실은 안경을 쓰면 어쩐지 지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그냥 안경을 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도수 없는 안경이 유행이었다.


딱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눈이 나빠진 것을 인지한 날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눈이 나빠졌다는 표현보다는 다른 표현이 필요한데, 아무튼 보이는 것이 약간 이상해진 순간이 있었다. 중학생이던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고, 날마다 오르내리던 언덕을 오르는데 아스팔트로 도돌도돌한 바닥이 마치 채널이 없는 티브이 화면처럼 자글자글 거리는 느낌으로 보였던 날, 와 신기하다 중얼거리며 눈을 꿈뻑이면서 잠깐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물론 엄마한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첫 모의고사를 본 날이었고, 엄마랑 아빠가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0년의 학창 시절 동안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눈이 조금 나빠진 것 같아서 안경이나 맞추러 가자고 이야기를 꺼냈는데 어쩐 일로 둘이 시간을 내서 와주었던 것이다. 부모님의 지인이 소개해준 종로의 조금 유명한 안과에 가기로 했고, 그곳에서 시력검사와 안압검사를 진행했다.


시큰둥한 나를 검사를 해주던 분이 기계 너머에서 내 동공을 들여다보면서 "와...." 하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 와... 이거 와....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놀라움이 이어졌다.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곳에 검사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쑥덕쑥덕 그 결과를 공유하며 와.... 와.... 말잇못이라는 말은 그때 없었지만,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안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몸에 혈압이 있는 것처럼, 안구 안의 압력을 측정하는 기준이지요. 정상범위라면 10-20 사이의 안압을 이야기하는데요 지금 이 학생의 안압은 45입니다. 몸의 혈압으로 치환한다면 혼수상태의 수준이에요. 심각한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수술이 필요합니다.






안구 안의 압력이 높아지면 안구에 붙어있는 시신경들이 눌려서 죽어간다. 안압이 높으면 안 되는 이유다. 의사는 궁금했던 이 상황을 장황하지 않게 설명해주었고, 설명은 간결했지만 결론은 큰 병원에 서둘러 가보라고 했다. 덤덤한 성격의 나와 달리 다혈질적인 엄마가 울기 시작했다. 당사자는 나인데 엄마가 울어서 엄마의 눈치를 보면서 큰 병원으로 이동했다.





녹내장입니다. 실명을 유발할 수도 있는 병입니다. 수술을 해야 합니다. 일단 안압이 너무 높네요. 녹내장이 많이 진행이 되어있습니다. 시야가 점점 좁아지게 됩니다. 자각증상이 늦게 옵니다. 원인은 알 수 없고 완치되는 방법은 없습니다. 보통 나이 든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병인데 이상하네요. 다행인 건 안압은 수술이나 안약으로 충분히 제어가 된다는 점입니다. 일찍 발견하기만 한다면 평생 큰 문제없이 지낼 수도 있습니다.



수능을 앞두고 있는 수험생이었던 터라 뭐가 더 중요한지 사실 잘 모르겠는 입장이었다. 한쪽 눈의 시야가 극단적으로 좁아져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른쪽 눈을 감으면 왼쪽 눈으로 볼 수 있는 범위가 손가락 세 개 정도. 다섯 개 손가락이 채 다 보이지 않는 좁은 시야였지만 공부하는데 지장은 없었다. 사람의 눈이 하나라면 약간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한쪽 눈만 잘 안 보이는 것은 생각만큼 불편한 일은 아니다. 한 번에 읽어야 할 문제가 손바닥보다 넓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통증 같은 것이 없는 병이었다. 내가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그런 병의 환자로 살아가게 됐다.


완치될 수 없는 병, 그러니까 이것은 불치병이기는 하다. 이미 죽어버린 시세포 들을 살려낼 수 없기 때문에, 일찍 발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수능이 끝나면 수술을 하기로 했고, 그 사이에는 안압 조절하는 안약을 사용하기로 했다. 녹내장 환자라고 해서 고3이 아닌 것은 아닌데 엄마는 나보고 공부도 하지 말라고 하고 책도 보지 말라고 했다. 막막하네, 안과 밖에서 나는 생각했다.




나의 이십 대에서 가장 큰 걱정은 진로 걱정이 아니었다. 앞이 안보일지 모른다는 캄캄한 걱정. 그 이후 이십 년이 지나면서 걱정이 조금씩 줄어들게 된 것은 그때와 상태가 거의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첫 발견 이후 나의 시력이나 시야의 상태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몇 개월 간격으로 안과에 가서 검사를 하고, 의사 선생님의 소견을 듣는다. 초기의 몇 년 동안은 병원을 가는 날이 다가오면 한없이 우울했다. 나의 앞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실명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연애를 해도 되나, 결혼은 할 수 있나, 아이를 낳아도 되나. 세상에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나. 어린 나이에 실명의 위기에 처해있는 스스로를 굉장히 연민했다. 결정적인 모든 순간에 어쩌면 닥쳐올지 모를 그런 실명에 대한 불안함이 늘 함께였다.



 

내 걱정은 삼사십 년 뒤에까지 가있는데 내 앞에서 내 눈을 보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은 6개월 단위의 이야기만 한다. 나중에 노인이 되면, 꼭 녹내장이 아니더라도 눈이 나빠진다던데 그때 나는 내 손주들에게 눈이 안 보이는 할머니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생각보다 그때 그 선생님의 수술이 성공적이었던 것인지, 이십 년이 넘도록 두려워했던 그다음 단계가 찾아오지 않았다.



녹내 장계의 권위자라고 소개되는 교수님은 수능 직후 수술을 해주셨고 두어 달, 혹은 육 개월 정도에 한 번씩 검진이 있는 날에 만났다. 수심이 가득했던 나와는 달리 선생님은 별 걱정이 없어 보이셨던 이유가 아마 이런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때,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조금 확신에 찬 어조로 나에게 말해주었다면 어땠을까. 시간이 흐르고 그 교수님은 은퇴하셨지만 내 병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태다.




의사 선생님들이 사용하는 화법에 대해 아쉽지만, 이해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안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라는 식의 화법이다. 상태가 아주 좋네요, 6개월 후에 뵙겠습니다. 진행된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보면서 다행이라고 하는 것.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병원에 다니는 일. 녹내장 환자의 보이지 않는 투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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