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포선라이즈 Nov 11. 2019

다정한 엄마를 찾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2년생 김지영씨가 부러웠던 이유








엄마는 늘 바빴다.

동네에서 제일 바쁜 갈비집의 사장님.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개업해서 대학 졸업 무렵 가게를 접을 때까지, 비수기 같은 것이 없었다. 언제나 북적북적거리던 장수갈비. 아침에 나가셨다가 우리가 잠들무렵에나 집에 돌아오셨다. 그 시절 워킹맘이라는 말이 없었지만 워킹맘이었다. 쉴 새 없이 살아가셨다. 다시 말하자면 무척 힘들고 바쁘셨다는 뜻이다.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나의 학업에 관심을 두시지 않았다. 두실 필요가 없기도 했다. 나는 공부를 꽤 잘하는 편이었고, 공부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하는 대부분의 교과과정에 최적화되어있는 아이였다.  별로 어려운 일 없이 학교를 다녔다.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우등생이었다. 초중고 과정을 거치는 동안 엄마가 학교 행사에 참여하셨던 적은 거의 없었다. 엄마는 바쁘셨고, 나는 그런 엄마의 상황을 이해했다.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래서 엄마랑 보냈던 다정한 시간 같은 것이 나에게는 없었다. 엄마는 늘 피곤했고, 바빴다. 그리고 무서웠다.  한시도 허투루 보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갈비집을 하면서 계모임도 여러 개 운영하셨다. 운이 좋았는지 돈을 떼먹고 달아난 사람에 대한 일화는 들은 바 없다. 늘 바삐 움직이셨다. 게다가 맏며느리의 역할에도 충실했던 터. 아빠 밑으로 5명의 형제자매들이 줄줄 서울로 상경해 올 때마다 우리 집 근처에 터를 잡았는데 어떤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셨는지 여부를 나는 알 턱이 없지만 어쨌거나 그 근처에서 반찬이라도 나눠주고 하셨겠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싹싹하시던데 나한테 유독 냉랭하셨다. 기억 속에 엄마의 다정한 얼굴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는데, 별다른 학원을 다니지 않고도 공부를 잘했던 나. 사람들이 엄마에게 공부 잘해서 좋겠어요 어쩜 그렇게 공부를 잘해요 부러운 마음을 드러내도 그냥 큰 감흥은 없으셨다. 그래서 나 스스로 그때는 시험 성적표를 받아오는 날에는 엄마에게 비싼 청바지를 한벌씩 사달라고 졸라서 입었다. 겟유즈드나 닉스, 나인식스뉴욕 그런 비싼 청바지들을 분기별로 사 입으면서 공부를 잘했던 억울함 같은걸 달랬다. 공부 잘하는 것을 생색내고 싶었는데 엄마가 그다지 치켜세워주지 않으니까 그렇게라도 보상을 요구했다. 또 하나 자연스럽지 않은 일은, 엄마는 하나뿐인 딸을 "우리 예쁜 딸"이라고 불러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고슴도치도 자기 자식을 예쁘다고 한다는 속담이 너무 옛날 말 같지만 엄마는 현실적이었고, 한결같았다. 아마 성격이나 표현의 문제였겠거니 해도 자라오면서 그런 부분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직설적인 엄마의 표현에 늘 상처 받았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주변에는 딸을 목놓아 예뻐하는 엄마들이 존재했다. 무조건 딸의 편에 먼저 서주는 그런 엄마들이 있었다. 딸을 쥐 잡듯이 잡지 않고 딸의 취향을 존중해주거나, 딸과 딸의 연애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그런 엄마들이 있다는 걸 많이 자란 후에 알았다. 실로 그것은 나에게 문화충격에 가까웠다. 평생 한 명의 엄마와 살아가기 때문에 다른 엄마와 사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할 일이 없었으므로 나에게 엄마란 우리 엄마가 기준이었다. 그래서 82년생 김지영 씨에게도 부러운 점이 있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내편이 되어준 엄마가 있다는 게. 공유같은 남편보다 다정한 친정엄마가 더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자연스레, 아이를 낳고 나면 엄마에 대한 애절함 같은 것이 생기는 줄 알았다. 적어도 나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며 회사를 다니는 나에 대한 엄마의 감정이 얼마나 복잡한지는 모르겠다. 나는 엄마랑 그러한 감정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엄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데, 너무 마음이 닳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랑 멀리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는 내가 싫다.  한마디 불평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저 내내 하는 생각은 한 번만이라도 내 마음대로 실컷 살아보고 싶다. 나의 살림, 나의 아이들, 내가 먹고사는 모든 순간을 엄마에게 평가받는 기분이라 한순간도 편하지가 않다.


아침마다 10분 거리의 학교에 등굣길 봐주신다고 찾아오셔서, 매번 내가 입혀놓은 아이 옷을 저-쪽에 가서 갈아입히고 계실 때마다. 내가 먹이는 음식들을 보고 한숨지으실 때마다. 애들이 감기가 걸리면 엄마의 탓이라고 타박할 때마다. 답답하다. 잠이 안 온다. 보통 친정엄마들이 다 이런가? 노란 옷을 입히면 노란색이라서 갈아입히고, 검은색은 검은색이라, 반팔은 반팔이라는 이유로 그냥 매번 갈아입힌다. 내가 내 아이 옷을 마음대로 입히지 못하는 현실. 나는 그만한 자유도 없다. 한 번은 내가 사입힌 옷을 갖다 버리신 적도 있다. 배기바지였는데, 그 스타일이 맘에 안 든다는 이유로 화를 내시고 내다 버리신 것. 그 충격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내가 자라는 동안 나의 학업에 1도 관심 없던 엄마가, 겨우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의 사교육에 대해 지나치게 개입하신다. 동네 다른 아이들이 다니는 만큼 왜 학원을 다니지 않느냐, 공부를 왜 시키지 않느냐, 애를 어떻게 키우는 거냐 라는 말씀에 번듯한 대답을 찾을 길이 없다. 나의 교육관은 그저 잘 놀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인데, 엄마라는 벽이 너무 높다. 돌려 돌려 생각해보면 본인이 그 시절 너무 바빠서 챙기지 못했던 자녀교육에 대한 열정을 뒤늦게 태우시는 건지. 짐작만 해볼 뿐이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첫 손주가 너무 예쁘다고 도움의 손을 먼저 내미신 것은 엄마였다. 베이비시터를 써야 할지, 아이를 어린 시절부터 기관에 보내야 할지 고민하던 터라 선뜻 엄마의 호의를 수락해버렸다. 그것을 거절했어야 한다고. 서로를 위해서 그랬어야 한다고. 친정엄마의 도움 없이 아이를 키우는 일에 대해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해본다. 사람들은 그나마 친정엄마가 있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며 감사해야 한다고 하니, 뭐든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겠으나 성인이 된 이후에 부모님과 매일 만나는 일에 나는 무척 회의적이 되었다.



가끔 정말 급한 일이 있을때, 다행인 그 순간들을 위해서 날마다 세밀하게 상처받는 일은 과연 합당한가. 나는 잘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로 엄마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둘째를 노플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