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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포선라이즈 Dec 05. 2019

내 인생의 새치기

군데군데 새치가 나기 시작했다.  종종 새치기도 당하고 있다.





강경숙 장관님이 임명되었을 때, 그 능력과 걸어오신 길도 멋있었지만 단연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은회색 빛깔의 머리스타일이었다. 대한민국 여성 정치인, 아니지 여성 기업인까지 통틀어서 60대 여성에게 이토록 멋진 헤어스타일을 본 적이 있었던가. 그나저나 강경숙 장관님은 새치에 대한 고민이 없으셨을까.


최근에 39.9살을 살아가면서 사소하지만 집요하게 나를 괴롭히는 것은 듬성듬성 눈에 띄는 새치다. 잠복하고 있던 새치들이 어느 날 문득 두각을 나타내면 속수무책 두피 지분을 내어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무기력할 수가. 그렇게 다가온 이 시기를 나는 새치기(期)라고 부르기로 했다.


밝은 색의 염색모로 살아가다 보면 한 달에 한번 뿌염 타이밍이 찾아온다. 일제히 까맣게 자라난 머리가 1센티 정도 블랙벨트를 이루면 그걸 그냥 견디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눈에 거슬리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뿌염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무지하게 귀찮으면서도 모르는척하기엔 엄청나게 거슬리는 종류의 일이라 머리를 다소 어두운 컬러로 염색을 하고 뿌염 경계가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유지를 하는 쪽으로 타협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금세 또 밝은 색으로 염색을 해버리고는 뿌염 박스권 안에 갇히게 된다. 그런 이유로 하는 뿌염은 귀찮지만 울적한 일은 아니었다.


그와는 별개로 이제 새치라는 것이 인생에 등장했다. 별생각 없이 뽑아봤는데 꽤 확실하게 마음먹고 나기 시작한 새치는 뽑아서 해결될 기세가 아니었다. 자고 일어나면 거짓말처럼 자라 있는 콩나물처럼, 갑자기 불쑥 올라오는 새치들이 놀랍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다. 남의 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서 또 한 번 염색을 결심하고 다소 어두운 톤의 갈색 계열 염색약을 사서 새치를 가렸다. 새치커버라니. 말도 안 돼. 다시 새치가 눈에 띄기 전까지는 잠시 평화롭겠지만, 아,  나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새치커버인가


인생에 황금기라는 것이 있다면 30대를 지나 40대 그 사이 어느 즈음으로 막연하게 기대했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그즈음에는 많은 것이 풍요로울 것 같았다. 더 이상 취업 걱정도 없고, 결혼 걱정도 없고 어쩌면 커리어적으로 가장 빛나는 그런 상태일 거 같았다. 막상 그 시기가 되니 그건 뭘 몰라도 한참 모르고서 했던 생각임을 깨달았다. 인생에 황금기라는 게 찾아올지 불투명하다는 그 사실만 명확해졌을 뿐. 지금 내 인생은 새치기에 도달해있다.


사실 새치기(期)는 새치기를 당하는 쉬운 시기인 것도 같다. 나보다 발 빠른 동료, 후배들이 나를 슬쩍 앞질러 가는 일이 빈번한 시기인 것이다.  마냥 위를 향해 올라가기만 하면 되었던 주니어 시기를 거쳐 중간 관리자쯤의 위치에서 현상유지의 느낌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다 보면 때때로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오는 혜성 같은 인물들을 주위에 목격하게 된다. 뒤처지는 느낌을 정신승리로 안일하게 표현하는 걸 수도 있지만, 나는 내 속도로 가고 있는데 주변에 나보다 속도가 훨씬 빠른 사람들의 소식에 상대적으로 새치기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극단적인 예로 최근 화제가 된 모 그룹 임원 발표에서 역대 최연소 상무로 임명된 사람의 나이는 85년생이었다.


10대에 앓았던 사춘기는 어린 내가 젊은 나로 넘어가면서 겪게 되는 통과의례였다면, 30대 후반에 찾아오는 새치기는 젊은 내가 덜 젊은 나를 받아들이는 기간이다. 최근 방영된 슈가맨 3에서 태사자가 출연했다. 슈가맨은 차트 역주행을 컨셉으로 하는 프로그램으로, 오래전에 차트 상위권을 달리던 가수들이 다시 나와서 그때 그 노래를 들려주어 추억을 소환해준다. 주로 내가 중고등학생 때 전성기를 누리다가 이제는 활동하지 않는 가수들이 나오는데 실로 십 몇년만에 방송을 탄 가수와 그시절의 노래를 듣고 나도 모르게 줄줄 따라 부르고 있으면 최소 몇 년생인 게 자동 커밍아웃된다. 이번에 태사자 편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그 시절 함께 노래방을 누볐던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나: 대박 태자사 봤어?  와 다시 들어도 너무 좋다.  

친구: 봤지 ㅎㅎㅎㅎㅎ 뭔가 그런데 다들 아저씨야ㅎㅎㅎ

나: 세월 직격탄ㅎㅎ

친구: 이제 살 빼고 꾸며도 어려 보이긴 글렀나

나: ㅎㅎㅎㅎㅎㅎ 어려 보이는 거 빼고 그냥 예쁘자



전지현에게도 새치가 날까? 왠지 전지현이라는 우리의 스타는 영원히 새치기당할 것 같지 않고, 새치가 날 것 같지도 않은데 슈가맨에 출연하는 오래전 사춘기를 함께 했던 가수들을 지금 다시 마주하면 어쩐지 나와 함께 새치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짠해지는 것이다.



사춘기의 여드름처럼 새치기의 새치도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려나. 그때는 새치가 아니라 본격 흰머리에 갱년기인 건가. 초고속 승진을 해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최연소 뭐가 될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확정이 된 지금 새치기의 나는 이런 속도가 싫지 않다. 경험해보지 못한 초고속의 세계와 직접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그냥 내 나름대로의 속도로 나의 일을 사랑하고 즐기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만족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서 크게 성공하겠냐,라고 나무란다면 할 말은 없다. 성공이 뭐 별건가.


새치기를 잘 보낸 후에 나는 강경화 장관님처럼 은회색 빛깔의 머리가 잘 어울리면서도 커리어적으로 어느정도 전문적인 여성으로 나이 들고 싶지만 역시 제일 좋은 것은 나이 들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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