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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포선라이즈 Dec 06. 2019

A형 독감과 워킹맘 최대 위기

우리 집에서 유행한 독감







금요일 밤, 둘째 아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응가를 시도하고 있었다. 아직 기저귀를 떼지 못한 22개월의 아기라 강아지처럼 한쪽 구석에 가서 혼자 힘을 주고는 하는데 영락없이 강아지 같다. 대수롭지않게 생각했다. 거실에 갔다가 주방에 갔다가 저쪽 방에 들어갔다가 현관으로 갔다가. 여기저기 자리를 옮기면서 얼굴에 힘을 주는 것이 수상했는데,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아이에게 달려가 안아주려고 했으나 완강히 거부를 하고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평소 잘 울지 않는 아이라, 레고 조각 같은 거라도 삼킨 것은 아닌지 걱정이 심화됐다. 그게 설마 변비의 고통 같은 것으로 울고 있는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던거다.


자기 몸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면서 울고 있던 이유는 심각한 변비 탓이었고, 그 쪼끄만 몸속에 어른 팔뚝만 한 응가가 꽉 차있었고, 그 일련의 해결 과정은 차마 이 글의 위생상 생략하겠지만 어마어마한 밤이었다. 가까스로 금요일 밤의 응급실행은 면했지만, 토요일 아침 일찍 서둘러 소아과에 갔다. 간 김에 뒤늦게 독감 예방접종도 했다.


그러고 나서 오후부터 큰애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예방접종 후유증 같은 거라고 생각해서 해열제를 한번 먹이고 그날 오후 외출을 했는데 집에 올 때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이제 초등학생이 된 큰애가 너무 오랜만에 아파서 당황스러웠다. 기운이 없다고 시무룩한 큰애를 오랜만에 끌어안고 얼러줬다. 밤에는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아냈다. 열이 내리라고. 일요일 밤에도 고열이 이어졌는데, 그렇게 주말 내내 간병인 모드로 지냈다. 아프니까 엄마가 잘해줘야 한다고 양말을 신겨달라 벗겨달라, 양치를 해달라, 물을 가져다 달라. 그 사이에 오래간만에 동생과 놀아준다면서 둘이 뽀뽀도 하고 끌어안고 하필 이럴 때 형제애를 과시했다.


월요일 아침이 되어 병원에 가보니 글쎄 A형 독감이란다. 생각해보니 열이 너무 심했다. 그렇게까지 뜨거울 일이 아니었는데, 감기가 아니라 독감이었던 거다. 학교를 갈 수 없다. 나는 올해 남은 연차가 없다. 급하게 남편이 연차를 내고 큰 아이와 집에 있기로 하고 둘째를 데리고 회사에 갔다. 둘째는 직장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퇴근 후 집에 왔을 때는 테라플루를 먹고 금방 컨디션이 나아진 것 같았지만 그다음 날에도 학교는 갈 수 없었다. 화요일에는 근처 친정집에 큰애를 맡기고 회사에 갔다. 오후에 키즈노트에 둘째 아이가 열이 38.4도 정도 된다는 메시지가 왔다. 맙소사.


하필이면 이번 주, 당장  클라이언트에게 들어가는 보고가 있었다. 그래서 내부 회의도 해야 하고, 자료도 준비해야 했다. 내가 잘하고 싶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라 재미있게 준비하고 있었는데. 일을 놓지 못하고 열이 난다는 아이에게 맥시부펜을 좀 먹여달라고 부탁하고 퇴근시간까지 만나러 갈 수 없었다. 제발 독감만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큰애가 아프다고 형아한테 가서 뽀뽀도 해주고 둘이 같이 어울려 놀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밤중에는 작은애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이번에도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낑낑거리는 둘째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안쓰러워하다가 날을 샜다. 둘째는 물수건 같은 게 몸에 닿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손으로 짚어보기만 하는데 옆구리 아래가 너무 뜨겁다. 새벽에 해열제를 한번 더 먹였는데 열이 떨어졌다. 아침에 소아과에 들렀더니 일단 목이 부은 감기라고, 항생제 3일 치를 처방해주셨다. 미안하지만, 약과 함께 어린이집에 보내야 했다. 첫째랑 같이 할머니 집에 맡겨둘 수도 없고, 내가 휴가를 쓸 수도 없는 상황이다.


회사 다니면서 가끔 아가들이 아픈 날은 보고 전날이거나 피티 전날일 때가 많다. 그래서 워킹맘의 처지는 괴로워진다. 일이 별로 없고 한가할 때는 아가들도 잘 지내는데 희한하게 내 회사생활을 꿰고 있다는 듯, 바쁜 시기에 아가들도 맞춰서 아프다. 그러면 일단 멘털이 흔들린다. 회사일이 중요한지, 아이의 건강이 중요한지. 서로 레벨이 맞지 않은 일을 두고 저울질하게 된다. 사실 둘 다 중요한 일이다. 일은 일대로 중요하고 아이는 아이대로 소중하다. 그 두 가지가 선택의 기로에 놓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한 번씩 시험에 드는 일이 발생해서 워킹맘을 벼랑 끝에 세우는 것이다.


가까스로 첫째가 완쾌 처방을 예상보다 일찍 받게 됐고, 다시 등교가 가능해졌다. 이번엔  불쌍한 둘째를 할머니 집에서 요양하게 했다. 말 못 하는 아기가 몸이 아프니까, 할머니한테 건네질 때 엄청 서럽게 울어댔다. 그런 아가를 두고 돌아설 때 마음이 미어진다. 우리 엄마도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려면 피곤하실 텐데, 혹시 엄마한테 감기라도 옮기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출근은 했다. 퇴근 후 저녁에 많이 풀 죽은 둘째가 내 품에 꼭 안겨서 떨어지지를 않는다. 안쓰러워서 내내 안고 있었더니 옆에 와서 큰애도 갑자기 다시 아프다고 한다. 둘째만 안아주니까 첫째가 관심받고 싶은 모양이다. "엄마가 토요일 일요일에 재희 아플 때 계속 재희만 안아주고 잘해줬지? 지금은 재인이가 아프니까 재인이 안아줄게. 재인이는 말도 못 해서 아픈데 어디 아프다고 말도 못 하니까. 이해할 수 있지?" 이해는 개뿔, 같은 표정을 지은 첫째가 뾰로통하다. 연일 잠을 못 자니까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다.


애들이 잠들면 부스스 일어나서 보고할 내용을 검토했다. 그리고 다음날 예정되었던 클라이언트 보고가 굉장히 잘 마무리됐다. 우리가 제시한 내용에 대해 너무 만족스러워해 준 것이다. 생각보다 싱겁게, 일이 잘 됐다. 그날은 조금 일찍 집에 갔다. 둘째 아이가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했는데, 내가 나타나니까 갑자기 웃으면서 반겨준다. 내 옆에 와서 밥도 먹고, 그날 저녁에 해열제를 마지막으로 먹고 새벽에 더 이상 뜨겁게 열이 오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독감에 걸려본 적이 없다. 지나간 건강에 대해 맹신하는 것만큼 미련한 일은 없다고 했지만, 나는 특별히 아픈 곳 없이 자랐다. 평생 감기 걸렸던 일도 손에 꼽는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던 기억은 없다. 충치도 없고, 여타 질병의 경험에 무지하다. 생리통도 없다. 내 아이도 안 아플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엔 아이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런데 지내다 보니 아이들은 무조건 아프면서 크는 거고, 어떻게 해도 안 아플 수가 없는 것인 거다. 돌아가면서 감기를 나누고 독감을 나누고 중이염을 나누며 수족구를 공유한다. 어린이집에 가면 옮고, 학원에 가면 얻어온다. 내가 회사를 다니기 위해서 아이들이 반드시 가야 하는 곳인데, 그곳에 가면 반드시 걸린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앞으로도 워킹맘의 위기는 몇 번이고 더 일어날 것이다. 다행인 건 아이들은 자라고, 자라면서 면역력도 자란다. 점점 아픈 빈도수가 줄어들겠지. 엄마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내 일도 잘하고 싶은 것이 욕심인지 아닌지. 내가 내린 결론은 양쪽 다 적당히 하는 것이다. 성공한 여자는 미혼이거나 이혼했거나 란다. 그만큼 성공과 가정생활의 병행이 어렵다는 이야기겠지. 얇고 길게 직장 생활하고 싶다는 말도 싫지만, 아이를 내팽개치고 워커홀릭이 되는 것도 탐탁지 않다. 그냥 회사일은 회사일대로, 육아는 육아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선을. 포기는 배추 셀 때만 쓰는 단어가 아니다. 적당히 포기도 하고, 선택과 집중을 해가면서 오늘도 나는 워킹맘의 위기를 넘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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