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경험이 있습니다
둘째의 두 돌이 돌아온다. 그 말은 내가 아이를 낳아본 날로부터 2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뜻이다. 여자들에게 출산 경험담이 남자들 군대에서 축구하는 이야기와 비슷한 거라고 하는데, 어쨌거나 낳아본 사람들만 아는 이야기라서 내밀한 연대감 같은 것도 있고, 서로의 무용담처럼 출산을 이야기하게 된다.
첫째는 보통 예정일보다 아이가 늦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우리 애도 평균적으로 다르지 않았고, 예정일에 아무런 소식도 없어서 1주일 후 유도분만을 예약했었다. 출산을 예약한다는 것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유도분만을 앞두고 계단을 많이 오르내리고 산책도 되도록 많이 하라고 해서 25층인 집까지 걸어서 착실하게 오르내렸다. 유도 분만하던 날도 그 어떤 출산의 기미를 느껴보지 못한 채로 약속의 새벽 6시에 산부인과에 갔다.
드라마틱한 출산 장면을 상상했었다. 갑자기 외출 중이었다가 배가 아파서 아, 아, 아윽 하며 배를 움켜쥐고 잠시 주저앉고 긴급하게 주위의 선량한 시민들에게 도움을 받아 분만실로 직행한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는 분만실에서 몇 번의 외마디 비명 후 정적, 그리고 터지는 아기의 울음소리. 드라마 속 전형적인 분만 상황에 너무 심취해있었던 모양이다. 드라마에서는 단 한 번도 "유도분만"을 상황으로 설정한 적이 없다. 그래서 더 낯설었던 나의 첫 출산.
새벽 6시에 오라고 해서 갔는데, 아이를 낳을 때까지 밥을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알 수 없는 서글픔. 짐볼 운동도 하고 병원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이걸 과연 운동이라고 해도 될까 싶은 사소한 동작들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유도분만 촉진제를 투입. 진통을 유도하는 거라고 했다. 아직 이렇다 할 유의미한 진통이 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뱃속에 아가가 태변을 본 것 같다고 했다. 양수가 안에서 터져있었는데 내가 그걸 몰랐던 거라는 말도 했다. 태변의 경우 어떤 위급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는 건데, 만에 하나 양수 안에 떠돌다가 이물질이 아이의 호흡기로 들어가면 굉장히 위험한 거라고. 그래서 되도록 분만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그냥 제왕 절개하면 안 될까요.
이런저런 이유로 제왕절개를 권하지 않으셨는데 이유가 기억이 잘 안 난다. 출산 후기를 검색하며 알게 됐던 "무통주사"를 요청하고 싶었는데 출산이 처음이라 프로세스를 전혀 몰랐고 언제 말을 꺼내야 할지 애매했다. 말을 꺼냈을 때는 이미 늦었다고 했다. 긴박하게 아이를 낳으려면 무통주사가 없는 게 낫다는 말과 함께. 또한 소아과 선생님 퇴근 전에 출산을 마무리하자는 말씀도 하셨다. 혹시 모를 아기의 상태를 염려해서 최대한 출산을 서둘러보자는 이야기였다.
정말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다. 나 그냥 제왕 절개하면 안 될까. 나 못하겠어. 너무 아파. 무섭다. 평소 엄살 부리지 않는 편인 내 입에서 이런 말들이 줄줄이 나왔는데 엄마가 커튼 밖에서 간호사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원래 애는 하늘이 노래지게 아파야 나오는 거라고. 나는 딸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딸이 아이를 낳고 있는 순간에 그런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엄마랑 나는 정말 많이 다르구나, 두고두고 떠오르는 장면이다.
아무튼 여러 출산 후기에서 묘사되어있던 찢어지는 그 고통 후에 죽을힘을 다해서 아이가 태어났다. 그게 뭐랄까, 딱 그 순간에는 감동보다 어이없음이 더 컸다. 그 고통이라는 게 어이가 없었다. 해냈다는 생각보다 아 뭐 이런 일이 다 있지, 싶었던 거다. 그런 내 심리상태와는 상관없이 이런저런 정리를 한 간호사가 내 배 위에 아이를 올려놓겠다고 하는 거다. 그래서 잠깐만요. 저 잠시만요. 지금은 아니에요 잠깐만요.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첫 출산 이후 6년 뒤에 나는 다시 같은 병원 분만실에 누웠다. 나의 둘째는 둘째 답지 않게 서둘러 먼저 나오거나 할 생각이 없는 아이였다. 그리고 태아 중에 덩치가 큰 편이라고. 예정일까지 두고 기다리면 아기가 너무 커져서 자연분만이 어려울 것 같다고 의사 선생님이 한 2주 정도 전에 유도분만을 하자고 권하셨다. 두 번째 출산에도 길거리나 집에서의 진통을 경험하지 못한 채 지정한 날짜에 병원에 가서 아이를 만날 준비를 했다.
늘 산부인과에 가면 느끼는 일이지만, 극심한 저출산 국가인 나라라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산모들이 산부인과에서 줄을 지어 대기하고 있다. 특히 이번 1월에는 정말 산모가 많이 몰렸다고, 유도분만도 줄을 이어서 하고 있었다. 내 차례가 돌아와야 아이를 유도해서 분만할 수 있는 상황. 내 앞에서 차례차례 비명과 아이 울음소리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동안 복도를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녔다. 분주한 분만실에서는 분만의 속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고 있었다. 하루에 분만할 수 있는 사람 수는 정해져 있고, 따라서 대기 중인 산모들에게 촉진제 투입하는 양을 조절해가면서 업무량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나는 순서에서 밀려나 하루 입원 후 다음날 오전에 다시 유도분만을 하게 됐다.
확실히 처음보다 능숙하게 아이를 낳았다. 유경험자답게(?) 적절한 타이밍에 무통주사를 신청했고, 뒤늦게 무통 천국의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처음에 척추에 커다란 주삿바늘을 꼽는다고 할 때는 잠깐 멈칫했다. 누가 대신 해주면 좋겠는데 이 상황을 오롯이 감당해야할 당사자는 애석하게도 나였다. 반신반의로 무통주사 바늘을 척추에 꼽고 나서부터 놀라운 경험이 펼쳐졌다. 어떻게 하나도 안 아프고 아이를 낳을 수가 있단 말인가. 출산의 전 과정에서 가장 아팠던 것은 무통주사 바늘을 꼽는 일이라니요. 무통주사가 투입된 후에는 진통이 올 때의 그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미미하게 느껴지는 어떤 고통이라 추정되는 감각에 맞춰 힘을 주기만 하면 됐다. 맙소사. 내가 너를 어떻게 낳았는데, 라는 엄마 전용 멘트는 둘째한테는 할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고통 없이 아기를 낳아도 되는 건가?
인간이 맨 처음 아이를 낳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이를 낳는 방식에는 큰 변화가 없다. 물론 임신 중에 많은 검사를 하고, 더 위생적이고 안전한 상황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기는 하지만 엄마가 뱃속에서 9개월 며칠을 소중하게 품고 다니다가 찢어지는 고통을 겪으면서 아이가 태어나는 이 과정은 변함이 없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백 년이 지난 후에도 인류의 출산이라는 것은 지금 내가 경험한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
쉽게 낳았다고 쉽게 키우는 것은 아니지만, 둘째는 둘째답게 알아서 잘 크고 있다. 둘째답게 눈치도 빠르고, 생각보다 빨리 큰다. 큰애랑 여섯 살 터울이 부담됐었는데, 그건 내 생각이고 둘이서는 잘 지낸다. 아쉬운 대로 혼자 노는 것보다는 여섯 살이나 어린 동생이랑 노는 것을 좋아하는 초딩 형아. 형아만 졸졸 따라다니는 둘째. 막상 4인 가족이 되고 보면, 세 가족이던 시절은 어색하기만 하다.
아무도 나에게 대단하다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 남편조차도 아이를 둘이나 낳은 일에 대해 대단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자기 몸에 작은 상처가 나서 조금만 피가 나도 아프다고 난리지만, 죽을 것처럼 아프다는 고통과 엄청난 출혈을 동반한 출산을 하는 아내에게는 대단하다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 아마도 잘 몰라서 그런 거겠지, 하고 남편의 입장을 이해해 보려 애써본다. 애도 낳았는데 그정도 애써보는게 대수인가. 어차피 남편도 남이다. 나의 대단한 출산 경험담을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것은 결국 나뿐이다.
대단하다, 잘했다, 고생했다.
두 번째 출산을 추억하며 내가 나에게 해주는 말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