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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포선라이즈 Jan 21. 2020

파닉스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파닉스가 뭐길래




바야흐로 4년 전. 어린이집에서 알파벳을 배우고 온 4살의 아이가 처음으로 a, alligator를 발음하던 그 찰나에 나는 무척 행복한 상상을 했다. 아, 이렇게 일찍부터 영어를 접하는데 요즘 아이들은 영어를 잘 못할 수가 없겠네. 실제로 내가 처음으로 alligator를 알게 된 건 중학생 때쯤인데. 우리 세대보다 10년은 앞서서 영어를 접하는데 앞으로 이 아이들의 미래는 얼마나 밝을지 굉장히 쉽게 그렇게 단정 지었다.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파닉스가 정확히 뭔지 모르고 살았다. 파닉스? 리딩, 라이팅 또는 독해, 단어 이런 식의 과정을 배운 것은 기억나는데 파닉스라는 과정을 배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아무튼 요즘 영어의 시작은 파닉스라고 한다. 어린이집에서도 유치원에서도 원어민 선생님과 파닉스 과정이 있다. 내가 별도로 영어를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영어가 우리 아이에게 찾아왔다.


결과적으로 1학년 현재, 우리 아들은 아직도 파닉스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영어유치원 출신이 아닌 일반 유치원에서 주 3회 이상 원어민 선생님과의 수업을 받은 아이들 대부분 파닉스가 어설픈 것에 약간은 실망을 했다. 아이들에 대한 실망이라기보다는 유치원 원어민 수업에 대한 실망이다. (물론 잘하는 한두 명의 애들은 잘하겠지만, 평균적인 친구들로 보면 대부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알파벳 각각의 음가를 알고, 영어로 된 단어나 문장을 읽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파닉스의 핵심이라고 하는데 그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알파벳이 그렇게 어렵나? 4살부터 이미 알파벳을 알고는 있었고 5살부터 3년간 이어진 파닉스 수업, 그거면 파닉스라는 것이 완성되기에 충분하다는 환상을 가졌던 것이다.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유치원 원어민 수업만으로는 파닉스를 떼기는 어려웠다. 집에서 별다른 영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확히 일반 유치원 원어민 선생님과의 주 3회 수업이 별로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 검증된 것이다. 집에서 추가 교육을 지원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1학년이 됐다. 같은 반 친구들이 많이 다니는 영어학원에서는 주 4회, 하루 2시간 30분의 수업을 한다고 했다. 파닉스반. 그 학원을 들어가려면 연초에 설명회에 참석하고, 추첨번호를 뽑고, 순번에 들어간 경우 레벨테스트를 볼 수 있고, 레벨테스트를 통과하면 비로소 파닉스반에 다닐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했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라는 것이 이런 거다.


3월부터 파닉스반을 다닌 친구의 현재 수준이 궁금했다. 그래서 1년을 다닌 후에 파닉스를 익혔나요? 아직 완벽하지 않다고 했다. 읽을 수 있는 것도 있고, 읽지 못하는 것도 있다고 했다. 2학년에도 이어서 파닉스반을 다닐 예정이라고 했다. 한 달에 영어학원비용은 약 40만 원 정도. 교재비라든가 부대비용 포함해서 1년이면 500만 원에 육박한다. 1년 동안 파닉스를 못 떼서 1년을 더 한다고 가정하면 파닉스를 떼는데 10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투여되는 셈이다.


파닉스 비용으로 1000만 원이라니, 용납되지 않았다.  기초가 중요한 것은 알고 있는데 파닉스에 1000만 원. 네?


영어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특히 지금 3040세대에게 영어란 못다 이룬 꿈같은 것 아닌가. 영어교육이 본격화된 세대이면서, 영어를 끝내 마스터하지 못한 그런 세대. 수능 영어에 이어 토익과 토플 같은 시험영어 쪽의 잘못된 노선으로 주입식 영어공부를 했다. 우선순위 영단어를 시작으로 평생 다시 볼 일 없는 무시무시한 수준의 단어들을 외우던 세대. 10년 이상 그런 영어교육을 받았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회사 다니면서도 영어학원을 다녔는데 끝내 영어회화 네이티브 스피커가 되지는 못한 그런 영어적 비운의 세대.


그런 연유로 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영어를 잘했으면, 그중에서도 생활영어를 잘했으면 싶다. 그냥 자연스럽게 회화할 수 있는 수준 정도로만 영어를 했으면 좋겠다, 마치 류준열처럼 이라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런 학부모들의 마음을 읽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리 아이 주위에는 영어가 준비되어 있었다. 처음 기대와는 달리,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 아이가 나 어릴 때랑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을 보이는데 모르는 척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한국인이라서 그러는 건데 누굴 탓할 것인가. 영어가 표준어로 지정되지 않는 한 해결방법이 없는 그런 일이잖아요.


내가 선택한 것은 집에서 최소한의 영어를 함께 해나가는 것이다. 어차피 학원에 보내도 학습의욕이 없는 아이의 경우에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을 거라 판단해서 파닉스 정도는 집에서 함께 해보자,였다. 쉽지는 않다.


"d는 드 소리가 나잖아. 여기에 a가 연결되면 대 라는 소리가 나. 거기에 m은 음 하는 소리가 붙어서 댐이라고 소리가 나는 거야. 알겠지? 그럼 sam, 이거는 어떻게 소리가 나지? s는 무슨 소리가 나지?"


"쌤! 엄마 그런데 영어로 쌤이 선생님이잖아요. 쌤~ 쌤~ 이렇게 불러요 선생님을"




아무것도 안 시킬 배짱은 없다. 아무것도 안 시키고 자유롭게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기만 하는 그런 용기는 나에겐 없다. 다만 살아가면서 영어가 걸리적거리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영어를 향해 한걸음 나아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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