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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포선라이즈 Jun 03. 2020

너는 나의 버터플라이

달리기가 느리고 수영이 느리다고 해서 생활하는데 지장은 없었습니다.








세 살, 우리 J가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한 나이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던 어린이집을 보냈다. 회사 복직을 앞두고 선택의 여지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럭저럭 다녔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별다른 대안은 없었고, 그냥저냥 지냈다. 동네 어린이집 수준이 다 그렇지 뭐, 하면서. 교육열이 뜨겁지 않았기 때문에 커리큘럼을 세세하게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냥 친구들을 만나고, 즐거웠으면 됐지 뭐.


그렇게 한 삼 년 정도, 다섯 살까지 쭉 어린이집에 다니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4살의 겨울, 갑자기 어린이집으로부터 5세 반을 없앤다는 통보를 받게 됐다. 같은 어린이집 다니던 예비 5세 친구들은 아무 생각 없었겠지만, 그 부모들에게는 몹시 복잡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미 알만한 동네 유치원들의 다음 학기 원아모집은 마감된 후였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시설이 많지 않은 동네라 선택지가 마땅치 않았다. 그러다가 근처에 새롭게 오픈하게 되는 스포츠형 유치원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렇게 갑자기 아기스포츠단이 되었다.


큰 아이는 참 잘 넘어졌다. 돌부리나 장애물이 없어도 돌아보면 넘어져있었다. 마치 만화처럼 방금 전 이 컷에서는 달려가고 있었는데 다음 컷에 보면 보이지 않는, 프레임 밖에서 혼자 넘어져있는 그런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자기 몸을 잘 못 가누는 듯했다. 처음엔 아이들이 다 그렇지 뭐 했는데, 우리 애만 그랬다. 아무것도 없는데 무언가에 걸려 넘어진다. 순발력이나 민첩성, 반사신경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편인 것이다. 하필이면 그런 아이가 스포츠형 유치원에 가서 스포츠형 친구들을 사귀게 됐고 유독 친구들은 운동신경이 뛰어났다.



어린이집부터 줄곧 친하게 지낸 친구 A의 엄마는 국가대표 탁구선수 출신. 아빠도 탁구선수였다고 하니까 그들의 2세인 A에게 타고난 운동신경이 없으면 이상한 상황이다. 잽싸고 날랬다. 입 근육도 근육에 속하는 건지 입도 빨라서 종알종알 쉴 새 없이 말하고 움직이고 뛰어녔다. 친구 B는 달리는 포즈가 예사롭지 않았다. 운동 잘하는 애들은 달리는 모습만 봐도 태가 난다. 그래서 "어머 B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운동을 잘해요?" 하니 "아.. 얘 아빠가 축구 실업팀에 있다가 은퇴했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맙소사.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을 이런 데서 확인하게 되는구나. 축구선수 출신 아빠를 두었다고 말하지 않아도 그 아들에게서는 축구선수 포스가 느껴졌다. 친구 C는 동네 친구다. 그 아이의 아빠를 놀이터에서 마주쳤는데 풍채가 남달랐다. 알고 보니 프로야구 선수였다고 했다. 이쯤 되면 우리 아들 주위로 스포츠인들의 2세가 몰려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질 정도로 친구들의 유전자에 스포츠가 흐르고 있었다.


그냥 일반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친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같은 반의 여자 친구들은 탄력이 남달랐다. 통통통 트램펄린을 뛸 때 보면 천장을 뚫을 것처럼 뛰어올랐다. J가 바닥에서 5cm를 채 벗어나지 못하는 검소한 점프 실력을 가진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한 친구는 발탁되어 리듬체조 선수로 전향했다. 부모님의 스포츠 유전자가 아니어도 어떤 친구는 생일이 빨라서 운동을 잘했고, 어떤 친구는 달리기가 무척 빨랐다. 다들 뭔가를 잘했다. 어리버리해보이는 아이도 수영장에 들어가면 갑자기 물개처럼 레일을 헤치고 달아났다.


여섯 살이 되면서 아이들이 누군가 술래가 되어 다른 아이들을 잡는 약속과 룰을 이해하게 되었고 "잡기 놀이"가 놀이터에서 성행했다. 같이 놀고 있는 줄 알았는데 J가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보니 나무 그늘 아래 쭈그려 앉아서 조금 쓸쓸한 뒷모습으로 개미를 잡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너도 가서 친구들이랑 잡기 놀이해봐 재밌겠다~"


딴청을 피우며 친구들에게 우리 땅굴파기 놀이하자,라고 제안하고 거절당하고 돌아서서 혼자 또 땅을 파고 있었다. 차근차근 물어보고 상황을 파악해 보니 달리기가 느린 J는 잡기 놀이를 하면 영원히 술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당연히 재미없는 놀이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그 놀이에서 한발 물러서는 쪽을 택한 것이다.


잘 넘어지는 데다가, 달리기가 느리니까 달리기가 싫고, 달리지 않다 보니까 달리기가 늘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잡힐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전속력을 다해 달리는 그런 쾌감 같은 것을 맛보기도 전에 늘 술래에게 덜미를 잡혔다. 동네 놀이터에서 달리기가 제일 느린 아이였던 것이다.


모든 아이가 달리기를 잘해야 하는 건 아닌데. 말은  쉽지만 이미 정해진 꼴등의 자리가 주는 재미없음을 너무 어린 나이에 접하게 됐다. 엄마로서 뭔가를 해 줘야 할 것 같았지만 나는 달리기가 빨라지는 방법 같은 것은 알지 못했다.



아기스포츠단에서는 날마다 한 시간씩 수영을 했다.


"아이들이 꾸준히 수영을 열심히 배우면 7살 과정을 마치고 졸업할 때에는 보통 평균적으로 버터플라이를 하면서 나갑니다."


입단식에서 나를 설레게 했던 말이었다. 졸업할 때까지 다니기만 하면 당연히 한마리 힘찬 버터플라이가  되리라고 믿어버렸다.


그게 J에게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인정해야 했다. 똑같이 시작했고, 같은 시간을 배웠는데 확연하게 기량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1년이 지나면 서다. 6살 가을에는 여러 유치원이 모여서 함께 하는 수영대회가 있었다. 6살 반은 참가에 의의를 둔다고 했지만, 연습경기를 해보면 반에서 18명이 참가하는데 J가 그중 17등을 했다. 아무리 참가에 의의를 둔다고 해도 매번 정해진 꼴등을 하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각 종목별로 메달을 땄다. 평소 조용하던 C도 배영 금메달을 획득하고 두루두루 좋은 성적을 거뒀다. 단상에 나가고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이 내심 부러웠다. 참가한 모든 선수들에게 똑같이 메달을 나눠주기는 했지만, 분명히 금은동메달은 따로 존재했다. J는 모르고 나는 아는 그런 대회의 이면이었다.


선천적으로 누군가를 이겨야겠다는 생각, 승부욕 같은 것이 없었다. 주위의 친구들은 누군가에게 졌다고 울고, 옆의 아이보다 자기가 빠르지 않다고 부모에게 때를 쓰고 신경질을 냈다. J에게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라 신선했다. 언제나 여유롭고 순하기만 한 J는 꼴등을 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경질 나지는 않는 듯 했고 다만 수영대회가 재미없다는 말을 했다.


이상했다. 누군가를 꼭 이겨야 하는 마음은 어떻게 가르쳐줘야 하는 거지. 그런 걸 가르쳐야 한다는 걸 미처 몰랐다. 마음속으로 '저 애 보다 잘하고 싶다'라는 생각은 누가 가르쳐줘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갖게 됐던게 아닌가. 그냥 다 이기고 싶다. 내가 제일 잘하면 좋겠다. 이기는 기분, 이기는 마음이라는 것이 없는 나의 J에게 너는 왜 친구를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냐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됐다. 경쟁심이나 승부욕, 그런 걸 어떻게 가르쳐야 하지?


결국 그런 말을 꺼내보지 못하고, 이듬해 수영대회에서도 꼴등을 한 후에 크게 나아지지 않은 상태로 아기스포츠단을 졸업하게 됐다. 입단식 때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과는 달리 우리 애는 버터플라이를 배웠지만, 할 줄은 모르는 상태였다. 아쉬워서 수영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J가 아니라 나의 아쉬움이었지만, 초등학생이 된 후에도 수영을 보내기로 했다. 버터플라이가 가능해질 때까지는 수영을 한다, 라는 목표가 있었다. 역시 J가 아니라 나의 목표였다.



왜 수영을 배워야 하는지, 수영을 잘하면 뭐가 좋은지, 옆의 친구를 이겨서 얻는 게 뭔지 전혀 이해를 못하는 J에게 수영은 그저 귀찮은 학원이었다. 그래도 보냈다. 지역구 수영대회에 나가서 메달을 노리거나 하는건 아니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수영장이 있는 곳에 놀러 가서 자연스럽게 수영을 즐길 수 있는 그런 모습이기를 바랐다. 운동신경이 별로 좋지 않은 J가 꾸준하게 배우고 익혀서 결국 뭔가 하나를 해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가끔씩, 수영 너무 힘들다고 투덜거리는 J를 애써 모르는 척하고 일주일에 2번씩 수영을 보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9살이 됐다. 저번 주 연차를 내고 수영장에 따라 간 날. 뭔가 그럴싸하게 엉덩이가 쑤욱 올라왔다가 내려가면서 다리로 물을 쳐내고, 수면 위로 어깨가 드러나면서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앞으로 날아오르는 한 마리 버터플라이 J를 보았다. 긴긴 번데기 기간이 끝나가나 보다.


몇 등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목표가 1등인 사람을 격려할 때나 하는 소리지만, 그 순간 내 눈에 너무 멋진 J를 보면서 정말이지 더 이상 몇 등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어떻게든 자라줘,

멋있게 지켜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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