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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포선라이즈 Apr 23. 2020

청혼의 반대말은

우리는 가끔 이혼을 말한다





시작은 나였다. 처음 아이를 낳고 힘들었던 나날들에 남편의 귀가는 날마다 자정을 넘나들었다. 기억은 미화되거나, 왜곡되기 쉽다는걸 안다. 몇번 그랬던게 매번 그랬던거라고 아마 왜곡 됐으리라. 전화를 받지 않고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남편은 영업상의 이유라고 했지만 그런 말이 이해될 리 없었다.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정적이라 생각한 남자가 회사 술자리가 우선이라서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가 울어도 아파도 보채도 함께 할 사람이 없었다. 이럴 거면 이혼하는 게 낫겠다고, 장문의 문자를 보내고 울어도 보고 이혼 서류를 가져오라는 말이 처음 나왔던 날이었다.


행복할 줄 알았는데 산다는 건 생각보다 복잡했다.


항상 참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 살려니까 힘이 들었나 보다. 아이를 키우고 회사를 다니는 것 만으로 인생이 가득했다. 여유가 없었다. 6년 만에 둘째를 낳았는데 남편은 늘 소파에 누워있고 싶어 하는 듯 했다. 그냥 돌려말하지 않고 다이렉트로 표현하면 그런 모습이 못견디게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번째로 이럴 거면 더 이상 같이 살지 말자는 말이 터져 나왔다.


그게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남편도 남편 나름 열심히 살고 있었을텐데, 그걸 부정당했다고 느꼈을 것 같다. 남편은 아마 그날부터 마음속으로 벼루를 갈았을 것이다. 한 달쯤 지나서 남편이 별 시답지 않은 상황에서 그래 나도 더는 못살겠다, 라는 말을 했다. 소심한 복수의 마음으로 시작된 일종의 워밍업같은 발언이었다.



코로나가 기승이던 초봄 어느 날, 조금 취해서 들어온 남편이 잠든 나를 깨웠다. 캄캄한 밤에서 아이들과 함께 자고 있던 나에게 남편이 조곤조곤 이혼을 제안했다. 결혼은 청혼이라고 부르는데 이혼은 절혼이라고 해야하나.


우리 둘이 잘 맞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청혼할무렵에는 서로 너무 잘 맞는것같다며 눈을 반짝이던 모습이 오버랩 됐다. 남편의 입장에서 준비한 이혼사유를 모두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었다.  장모님. 장모님은 언제나 본인의 딸을 위하면서 사위를 평가절하한다는 것이 큰 스트레스였다는 내용이었다. 처갓집 근처에 살면서 이런저런 도움을 받고 있지만, 그만큼 장모님의 서스름 없는 잔소리를 듣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 가끔씩 수위조절 없이 터지는 모진 말에 대한 면역이 생기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반박할 수 없는 부분이라 듣고만 있었다.


본인이 바람이 났다거나 한 것은 아니며 진지하게 하는 말이고, 제일 고민인 부분은 아이들 양육에 관한 것이라고. 큰 아이는 본인이 꼭 데려가고 싶다는 말과 함께 이미 본인은 다 결정을 하였으니 생각해보고 말해달라고 하고는 코를 골며 잠이 든 남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심장이 두근두근 했다. 청혼을 받을 때와는 사뭇 다른 두근두근함이었다.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한참 잠이 오지 않아 눈을 껌뻑이다가 용기내어 남편을 흔들어 깨워봤다. “오빠, 아까 한말 진심이야?” 냉랭한 목소리로 알아서 잘 생각해봐, 하고 말하더니 돌아누워버렸다.  남편이 그냥 해본 소리라고 배시시 웃기라도 바랬나.


나도 변했고, 남편도 변했다. 나이도 들었고, 아이들도 생겼다. 아이들을 키우고 회사를 다니는 일은 쉽지 않다. 자유라는 것은 줄어들었고, 의무는 많아졌다. 그냥 애들때문에 산다, 라는 말을 이해해보기도 전에 그렇게 살고 있다는걸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 같이 살고 있는건지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해야할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이혼을 하게 된 건 아니지만 한동안 남편이 너무 먼 사람 같이 느껴졌다. 사회적거리두기 운동을 남편과 하게 됐다. 남편에게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긴장이 됐다. 뭐든 다 싫다고 할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남편이 뭘 좋아하는지를 모르겠다. 정확히는 이해를 못하는 거겠지. 이혼을 이야기 하기 일주일 전이었던가.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기운 없이 지내시는 엄마를 모시고 근교 드라이브를 가고자 하는데 남편이 싫어할 것 같았다. 뚱하게 있을 남편을 생각하니 그것도 별로여서 나와 작은아이만 다녀오겠다고 했고, 남편의 반응은 많이 이상했다. 갑자기 큰 아이에게 할아버지 보러 가자면서 인위적인 말투로 과장되게 행동을 했다. 내가 엄마랑 평소에 자주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외할머니의 장례와 함께 눈에 띄게 기운 없어하시는 엄마를 모시고 나가는 특수한 상황이었는데도 본인의 부모님과 나들이를 가지 못하는 것을 염두에 둔 소리로 들려서, 화가 나기보다는 실망을 했다.



뭐 어찌 됐든 한번 입 밖으로 터져 나온 말들을 주워 담을 방법은 없고, 우리는 서로 이혼을 이야기 한 사이가 됐다.



그날 밤부터 나는 이혼녀로 살아가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봤다. 현실적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싱글맘으로 살 수 있을지. 얼마 되지 않는 재산 분할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그나마 둘이서 힘을 모아 두 아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남편이 꼭 데려가고 싶다는 큰 아이는 어떻게 자랄까. 뭔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 이후. 명확하게 다시 이혼에 대해 꺼내놓고 말하지 못했다. 은근슬쩍 어영부영 넘어갔다. 나는 이전보다 설거지 하는 횟수가 늘었고, 남편은 나에게 하이패스카드를 내밀었다. 내 차에 필요한 것을 찾아서 나름 마음을 표현한건가. 서로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우리는 조용히 이혼을 보류한 사이가 됐다. 아이러니 하지만 그렇게 남편에게는 조금 더 친절해졌다. 언제고 깨질 수 있는 관계라고 인정하고 보니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남편도 마찬가지겠지. 우리는 서로 낯설게 지내고 있다.





더할나위없이 행복하다거나, 극도로 결혼생활에 만족한다는 사람은 거의 못만나봤다. 다들 주어진 결혼 생활에 충실하는거지, 결혼 "생활"에 대해서 말할때는 많은 사람들이 피로와 고충을 드러낸다. 주위에 결혼을 한 친구나 선후배들을 보면 다들 종종 이혼을 들먹인다. 이혼을 말할때 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하고 심각하다. 이렇게는 못살겠다, 성격이 안맞는다. 비슷비슷한 이유들이고 들으면서 맞장구를 치다가 돌아서서는 또 별일 없는 사람들처럼 지낸다. 그리고 그중 몇몇은 실제로 이혼을 한다.


 

언젠가 어쩌면 이혼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평생 이혼을 보류한 상태로 살 수고 있을 거고. 꼭 결혼생활을 끝까지 이어나가는 것이 미덕인 시대는 아닌데도, 이 결혼생활에 대한 의무감이 신기하다. 그런걸 사랑이라고 말해도 되는건지도 모르겠다. 청혼을 받았을 때는 상상도 못 했던 단어. 우리는 요즘 이혼을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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