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don't do it. (일단 하지마)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꿈이라고만 여겼던 세계 여행을 현실화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왜 그저 꿈 혹은 책 속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렇다고 세계 여행이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퇴사를 하는 것도 말이다. 얼마나 어렵게 한 취업인데. 힘들게 뒷바라지해 주신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와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을 잠깐 힐끔거리고는 다시 우물 안으로 돌아가는, 그런 씁쓸한 기분이었다. 암흑이 스멀스멀 나를 감싸는 기운이 감돌았다.
다음 날, 복잡한 마음을 부여잡고 출근했다. 겨우 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는데, 강 차장이 신이 난 말투로 말했다. "휴가 다녀온 기념으로 다 같이 한 잔 해야지, 안 그래? 우리 한 동안 못 봤잖아?"
터키에서 얻었던 희망은 검은 안갯속에 힘을 잃어버렸다. 또다시 암흑이 가슴팍으로 파고들면서 느껴지는 냉기가 오싹했다.
프로젝트 협업 차 옆 팀 김 과장을 찾아갔다. 김 과장은 회사에서 만난 사람 중에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영혼 없이 회사만 왔다 갔다 하는 좀비 같지가 않았다. 퇴사 후 시작할 사업도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독서광이었고,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자신이 쓴 에세이 책도 출간한 작가였다. 좋은 책들도 곧 잘 추천해 주었다.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인생 선배였다.
업무 협의를 끝내고 서로 안부를 물었다. 나는 터키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고민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읽어보라고 추천했다. 목이 말라있던 나에게 오아시스 같은 책이 될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했다.
다음 날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책이 도착해 있었다. 포장을 뜯고 책을 집어 들자 낮에 쌓인 피로도 싹 가시는 듯했다. 편안한 옷으로 급하게 갈아입고 책상에 앉아 한 장 한 장 읽어나갔다. 어두운 안개 너머로 주인공 산티아고가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앉은자리에서 책 한 권을 독파해 버렸다. 산티아고는 양치기 소년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양들을 포기하고 보물을 찾아 이집트로 길을 나선다. 그 여정에서 크고 작은 것들을 경험하며 '자아의 신화'라고 일컬어지는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깨닫는 이야기였다.
책을 덮고 생각했다. '내 자아의 신화는 뭘까?'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내일 죽는다 해도, 해협을 건너고, 크리스털 가게에서 일하고, 사막을 알고, 파티마의 두 눈을 보고 난 후의 죽음이었다.
집을 떠나온 후로 그는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다. 내일 죽게 될지라도, 그의 두 눈은 다른 양치기들이 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지 않았는가.
그는 그게 자랑스러웠다.”
산티아고에게서 나를 보았다. 번듯한 직장과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고 ‘나’를 찾겠다고 떠나는 여행자 말이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었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보고 듣고 체험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와 나는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게 자랑스러울 것이었다.
다음 날, 몸은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지만, 가슴만은 '자아의 신화'로 가득 차 있었다.
“죽는 순간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질 때, 밥 한 끼 못 먹은 것이 후회될까? 아니면,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이지만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이 후회될까?”
이스탄불에서 들었던 말이 자꾸 떠올랐다.
동시에 4500만 원의 연봉과 매년 나오는 500만 원 정도 보너스, 그 외 숙소, 밥값 지원 등의 복지, 얼마 전에 할부로 구매한 새 차, 무엇보다 합격했을 때 너무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얼굴과 함께 검은 안개도 같이 피어올랐다.
다음 날, 김 과장을 찾아가 연금술사를 읽고 떠오른 이런저런 생각들을 털어놓았다. 책에서 어떤 희망의 빛을 보았지만, 또 한편으로 경제적 이익과 부모님의 기대를 져버리기가 어려운 마음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얼마나 힘들게 한 취업인지를 생각하면 퇴사가 망설여진다고도 덧붙였다.
그러자 그가 잠깐 생각에 빠진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연화 씨, 야생 원숭이 사냥을 어떻게 하는 줄 알아?" 나는 뜬금없는 질문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고개를 흔들며 모른다고 대답했다.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입구의 항아리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넣어두는 거야. 그러면 원숭이가 와서 거기에 손을 집어넣잖아? 그럼 그때 사냥꾼들이 잡으러 와. 그런데도 그 원숭이는 바나나를 꼭 잡고, 그 손을 빼지 못하지. 그래서 결국 잡히게 되는 거지."라고 김 과장이 설명했다.
‘내가 지금 그런 원숭이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 눈앞에 놓인 순간의 이익을 버리지 못해 평생의 자유를 잃게 되는 그런 바보 같은 원숭이 말이다.’
요즘은 가슴을 더욱 깊게 찌르는 암흑 때문에라도,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죽게 되면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한 달 중 단 하루만을 즐겁게 해 주는, 마약 같은 월급을 위해 나머지 29일, 30일은 좀비처럼 지냈다. 매주 평일을 버텨내기 위해 주말마다 가는 백화점 때문에 통장은 늘 텅텅 비어 있었다. 힘들게 버텨내서 돈을 벌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돈이 쌓이기는커녕 의미 없는 물건과 깊은 한숨만이 쌓여갔다.
내 인생에 이 길만이 전부일리가 없었다.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은 무궁무진한데, 이 우물 안에서만 살다가 죽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분명 다른 길이 있을 것이다. 그 길을 확인하려면 우선 여기를 나가야 했다.
하루를 살더라도 의미 있게 살다 가고 싶었다. 아직 선뜻 세계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장담하지 못했지만, 우선 명확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한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갖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일을 멈추는 것도 큰 용기이며, 행복을 향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회사부터 관두기로 했다. 암흑의 냉기만이 흐르던 텅 빈 가슴이 따스한 열정으로 가득 차 올랐다.
사표를 제출했다. 후임을 구하고 인수인계할 시간이 필요해 한 달 뒤로 퇴사 날짜가 정해졌다. 남은 연차를 다 쓰기로 했다. 고향에 내려가서 퇴사를 알리고 올 참이었다. 부모님은 아직 몰랐다. 혼자서 고민하고 결정한 일이었다. 충동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2년 동안 치열하게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부모님께는 죄송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나이가 되어 더욱 헛헛해진 마음으로, 부모님 때문에 회사를 꾸역꾸역 다녔다면서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싶었다.
부모님께 편지로 진심을 전하기로 했다. 그동안 어떤 고민들을 해왔는지, 왜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에 관해 손 글씨로 꾹꾹 눌러쓰다 보니 5장이나 되었다. 차마 눈을 마주치고는 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잘 보이게 탁자 위에 두고 밖으로 나와 한참을 걸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집에 들어갔다. 아버지도 퇴근해서 편지를 읽으신 것 같았다.
아무 말 없이 저녁을 먹다가 아버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람 다시 짐 싸서 부산 내리 와야겠네."
냉랭한 정적 속 무뚝뚝한 부산 사투리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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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배낭 여행을 다녀온 이 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블로그에 쓰고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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