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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oker Jan 19. 2017

<모아나>가 떠나온 것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의 이름은>에 묻혀서 개봉 소식조차 모르고 있던 <모아나>

개봉 하루 전에서야 온라인 광고로 알게 된 <모아나>의 포스터에는 아주 건강해 보이는 두 남녀가 서있다.

<모아나>를 보고 '디즈니는 더 이상 백마 탄 왕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던 허남웅 기자의 한줄평을 실감했다.

소재면에서는 결국 '꿈을 좇는 공주의 클리셰'를 따라가며 <라푼젤>의 계보를 잇는 듯했으나 그 안의 여성은 이전의 공주들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모아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모아나였기 때문이다.



1. 디즈니의 공주들

디즈니의 공주들

위 사진의 캐릭터는 모두 디즈니 영화의 공주들이다.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신데렐라>는 수동적인 여성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왕자의 키스를 바라는 두 명의 여성(백설공주, 오로라)은 말할 것도 없고 평생 구박받고 살다가 요정 대모의 하룻밤 마술에 꾸는 꿈이라는 것이 고작 무도회에 가는 것인 신데렐라 역시 마찬가지다.

수동적인 여성상을 피하고 싶었던 디즈니가 내놓은 <인어공주>와 <미녀와 야수>에서의 두 여인은 좀 더 매력적이다.

이 둘은 물론 희생을 강요당하지만 그래도 '선택' 이라는 것은 가능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인어공주>의 에리얼은 왕자를 만나기 위해 금기를 깨고 뭍으로 올라가는 선택을 하고 <미녀와 야수>의 벨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야수에게 가는 선택을 한다.

그 이후로 디즈니는 <알라딘>의 재스민, <포카혼타스>, <뮬란>, <공주와 개구리>의 티아나를 내세우며 피부색에서부터 다른 공주상을 제시했으나 이들 여성 역시 완벽하게 남성독립적이거나 능동적이진 못하다는 비판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뮬란>은 특히나 동양을 바라보는 서양의 편파적인 시각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많은 비판을 사게 된다.

<라푼젤>의 한 장면

이후 디즈니 최초 3D 애니메이션인 <라푼젤>이 등장하는데 라푼젤은 드디어 주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성으로 묘사된다.

자신의 매끄러운 머릿결을 뭉툭하게 자를 수 있는 여성의 등장이 상당히 반가웠지만 사실 <라푼젤> 역시 모험의 발단 자체가 플린 라이더라는 남성 인물의 침입이라는 점이 아쉽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에서 메리다는 남성의 도움 없이 드디어 홀로 설 수 있는 여성의 모습을 제시하며 프라이팬이 아닌 활과 화살을 들고 말을 타며 숲을 누빈다.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인 결혼을 거부하고 남자들을 설득하는 그녀의 모습은 가히 그전까지 나온 디즈니의 공주들 중 가장 매력 있었다.

또한 북유럽의 영어 발음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기존의 매끈 탄탄했던 공주들과의 차별을 둔 점도 기억에 남는다.

<메리다>는 사실 북유럽의 국가의 모습을 편견 없이 보여주며 그들의 설화나 신화를 소재로 했다는 것 자체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

곰으로 변했던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메리다의 계보를 잇는 것인지 디즈니가 다음으로 내놓은 영화들은 이 두 편이었다.


사실 이 영화는 자신들이 만들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대한 '카운터 펀치'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다.

<겨울왕국>에서는 그동안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이상형으로 그려왔던 '백마 탄 왕자' 한스가 사실 악인이라는 반전이 등장했고 <말레피센트>는 자신들이 이미 애니메이션화 했던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결말을 바꿨다.

위와 같은 특징을 통해 두 영화 모두 백마 탄 왕자보다는 가족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 공주들의 계보 속에 모아나가 등장한다.

(물론 모아나는 공주가 아니라 추장의 딸이며 그 스스로가 공주가 아니라고 하기 때문에 공주의 대열에 끼게 될지는 모르겠다.)


역대 디즈니의 공주들



2. 모아나가 떠나온 것들



영화에서 모아나는 무엇인가에 이끌려 바다로 향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바다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버지이다.

<모아나>는 사실 모계 사회의 신비함을 부각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사건의 발생 자체가 여성 신으로 그려지는 '테 피티의 심장'과 관련이 있다. 

또한 모아나를 바다로 가게 부추기는 것도 모아나의 할머니이다.

여신 테 피티는 말할 것 없고 모아나의 할머니도 역시 가오리를 부리는 신비한 능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죽어서는 가오리로 화하여 모아나를 도와준다.

또 모아나에게 그녀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 역시 할머니이다.

그런가 하면 모아나의 어머니는 모아나가 바다로 떠나는 것을 막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포옹해주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바다로 떠난 모아나는 그를 얽매는 가부장적인 남성에게서 벗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을 규정하려는 남성성에서 벗어난 모아나는 이제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뿌리를 찾으러 여행을 떠난다.


땅과 불의 신 테 카

하지만 자칫 이러한 점은 여성성을 긍정적으로 남성성을 부정적으로 그리는 편파적인 시선으로 오인받을 수 있다.

하지만 <모아나>는 영리하게도 하나의 설정을 통해 그러한 비판에서 피해 간다.

바로 땅과 불의 신 테 카가 테 피티라는 설정이다.

즉 이를 통해 여성 역시 양면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준 셈이다.

게다가 유치하게 여행자의 조상이 여성이라는 설정도 가미하지 않아서 좋다.




3. 한 번에 성공하는 법 없이


<모아나>가 흥미로웠던 점은 바로 모든 과정을 두 번씩 반복해서 보여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한 번의 실패 끝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모아나의 첫 항해는 실패로 끝난다.

아버지의 말이 사실임을 깨닫고 포기하려고 할 때 할머니 덕에 다시 항해를 시작하고 테 피티의 심장을 얻은 모아나에게 바다는 친구가 된다.


그런가 하면 마우이가 타마토아에게서 갈고리를 찾는 과정 역시 한 번의 실패가 있었다.

모아나의 도움으로 마우이가 자신의 갈고리를 찾았으나 타마토아에게 뺏겨 다시 등딱지에 붙었다가 두 번째 시도 끝에 갈고리를 찾아 탈출에 성공한다.

테 피티의 심장을 가져다 놓으려고 테 카를 뚫고 가는 클라이맥스 역시 한 번의 실패 끝에 성공한다.

다른 영화라면 클라이맥스에서의 실패는 그릴지 모르겠지만 발단이나 전개 과정에서의 실패는 거의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 얼마나 힘들게 노력을 해서 그 결과물을 얻었는지에만 집중을 하고 그 노력 끝에 얻은 결과물은 굉장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즉 노력이 있다면 결과물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아나>에서는 간절히 바랐던 것이라도 한 번에 손에 넣을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나 초반부에 당연히 성공할 줄 알았던 모아나의 첫 항해가 실패한 것은 관객들에게도 굉장히 의아하지만 

이는 곧 자아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은유한 것이기도 하다.




4.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테 카와 두 번째로 맞붙는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모아나가 자신이 버린 테 피티의 심장을 찾아 바다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에서는 모든 과정을 두 번씩 보여준다.

테 피티의 심장 역시 두 번 모아나의 손에 들어온다.

한 번은 바다가 모아나를 선택했을 때 바다가 직접 모아나에게 준다.

(물론 그 후에 할머니에 의해서 다시 모아나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두 번째는 모아나가 바다를 버렸을 때 모아나가 직접 바다로 들어가 이를 찾아온다.

바로 모아나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스스로 바다에 들어가는 장면이다.

이 힘찬 헤엄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뤄진다.

곁을 지키던 반신반인 마우이도 떠나갔고 테 피티의 심장을 버렸기 때문에 바다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마침내 마주하고 사명을 다하기로 결심한 모아나의 헤엄은 이 영화의 어떤 장면보다도 소름 돋는다.

또 (관객들은 물론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조상을 따라 'How far I will go' 를 부르며 나아가는 그녀의 모습에는 그 어떤 남성성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조상들의 돌 위에 바다가 준 소라고동을 얹음으로써 모아나는 그 누구도 아닌 모아나 자신임을 드러낸다.




5. 문화에 대한 편견 없는 시각

<뮬란>에서 받은 비판을 기억하기라도 한 것일까.

<모아나>는 원주민들의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을 잘 표현해냈다.

할머니나 마우이의 문신들도 그렇고 세계가 만들어진 신화나 세계관 자체가 백인이나 서양 편파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특히 클라이맥스 전에 조상들의 혼을 보고 자신의 갈 길을 찾는 부분은 인디언들의 조상에 대한 의지와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노래들은 여전히 환상적이고 중독성이 있으며 미워할 수 없는 동물 캐릭터들도 등장한다.

특히 쓸모없는 닭 헤이헤이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딱 한 번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는데도 익살스러운 모습이 일품이다.

바다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수 있었던 것에는 사실 헤이헤이의 공도 크다.

(그 누가 귀여운 돼지 푸아를 놔두고 멍청한 헤이헤이가 메인이 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돼지 푸아(왼쪽)과 닭 헤이헤이(오른쪽)


P.S. 영화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단편 애니메이션도 단연 압권이다. 영화에 늦는 일이 없도록!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쿠키영상이 있다. 영화 끝났다고 바로 나가는 일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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