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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웨인 Jan 22. 2018

깊은 수수께끼

너의 죽음을 말한다


해답 없는 수수께끼가 나를 불렀다


그런 경험이 있나. 눈을 떴는데 기분이 묘하다. 그 기분이 뭔지 생각하니 몽롱하다. 잠이 덜 깨서인지 기분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아침부터 묘하다는 것은 좋지 않다는 걸까. 그래, 일어나니 기분이 별로다. 이유를 모르니 더 묘해. 평범하지 않으니 어떤 징조일지 모른다. 징조는 기쁨보다 아픔을 의미한다.


몸의 신진대사를 멈추고 근육을 끊어냈다. 고요하면 징조의 소리가 들릴 듯하다. 꽤 오래 웅크린 채 그림 속 정물처럼 버려진 아이. 아침의 묘한 기분이 알아챈 기억이다. 오래된 수수께끼가 있다. 정석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 해답 없는 수수께끼가 나를 불렀다.





문득 친구가 생각난다. 이상한 일이다.


주인집 이모에게 목욕탕 간다는 쪽지를 남기고 간 지 한 달 만에 돌아왔다. 진저리 나게 적응했던 서울이 다시 낯설다. 놀란 눈으로 "무슨 목욕을 그렇게 오래 했니?" 농담하는 이모도 낯설다. 정신을 불려 박박 씻기고 싶다. 목욕탕에 가서 옷을 벗는다. 물은 뜨겁고 깨끗하다. 탕 안에 앉아 눈을 감았다.


대학은 생각 달랐다. 기대가 사라 하고 싶은 일도 없어졌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도박에 집중했다. 낮에는 당구, 밤에는 포커를 했다. 도박은 친구가 필요 없다. 날 에워싼 모두가 적이다. 처음 본 널 잡아먹으면 된다. 잡아먹힌다는 건 뇌리에 없는 말이었다. 그것은 끝을 의미했다. 


친구들과 연락을 끊은 지 오래됐다. 문득 친구 하나가 생각난다. 이상한 일이다. 목욕탕의 빨간 공중전화기가 눈에 띈다. 친구의 전화번호가 떠올랐다. 갑자기 그놈이 보고 싶다. 일 년 만에 하는 통화였다. 발신음이 울리고 여자분이 받으셨다.


"여보세요? 친구 OO라고 하는데 OO 좀 바꿔주시겠어요?" 벌거벗은 내가 말한다.


"누구? 지금 집에 없는데......" 낮고 낯선 음성이다.


"아..... 잠시만요." 잠깐의 간격이 흐르고 누군가 바꾸는 소리가 들렸다.


"OO니? 아이고 OO야!!!" 친구 어머님의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친다.


" OO이가...... 오늘 새벽에......" 울음 가득한 음성으로 채 말을 잇지 못하신다. 말을 잊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곳에 떠 있다.



머리가 하얗다. 대충 츄리닝을 입은 채 용산 철도병원으로 갔다. 영안실에는 친구의 웃는 사진이 덩그러니 놓였다. 꽃 한 송이 없는 벌거벗은 친구였다. 사진 아래 털썩 주저앉았다. 정을 준 유일한 친구였다. 매년 1월 1일 자정이면 시골에서 전화했다. 멋지게 살자고 얘기했다. 우린 겨우 중학교 3학년이었다.


날 인정해준 친구였다.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을 지녔고 사유가 깊은 친구였다. 세상을 함께 공유한 친구였다. 10대를 온전히 같이 한 친구였다. 좋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아픔이 많은 놈이었다.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서 멋진 모습으로 이쁜 여자애들 100명쯤 꼬시자고 약속한 놈이었다.


타고난 말발로 숱한 여학생을 흔들던 놈. 명동 사보이호텔 앞에서 담배 피우다 경찰에게 걸렸을 때 "난데스까?"라고 함께 외치던 놈. 내신을 위해 서슴없이 자퇴를 한 놈. 닮고 싶은 친구였던 바로 그놈.


그놈이 떠났다. 한강맨션 5층 집 앞 현관에서 유서도 없이 뛰어내렸다. 유서 대신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남겼다. 난간에 걸려 화단으로 추락해 숨이 다할 때까지 고통스러워했을 거라 한다.



죽는 것은 겁이 나지만 산다는 것은 아쉽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대낮, 빛이 들지 않는 영안실에 나도 너처럼 맨발로 앉아 있다.


"이 새끼! 나중에 죽어 다시 만나면, 여전히 스무 살 새파란 놈이겠구나. 거기서 천사들 잔뜩 꼬시고 있겠구나. 부럽다!!! 이 자식!" 끝도 없이 주절거렸다. 진심으로 투덜거렸다.


죽는 것은 겁이 나지만 산다는 것은 아쉽지 않았다. 죽음마저 의지로 실행한 놈이다.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픔보다 했다. 먹먹한 충격으로 주절거리는 내내 웃었다. 눈물을 몰라 웃는 놈처럼 웃었다. 눈동자를 도려내면 눈물이 세상을 덮을 텐데.






세월이 흘러 적지 않은 죽음을 봤다. 친구를 서랍에 묻고 없는 사실처럼 살았다. 묘한 징조로 떠올린 기억 안에 너의 얼굴과 전화번호가 선명하다. 문신처럼 박혀 뜯어낼 수 없다. 수수께끼 같다.


친구들 사이에 그놈 이야기는 금기였다. 가끔 얘기를 꺼내는 것은 나였다. 자살 따위로 떠난 슬퍼해야 할 놈이 아니었다. 그는 나보다 먼저 떠나, 내가 꼬셔야 할 천사들을 선수 친 놈이었다. 약이 오르고 부러웠다. 그놈이 '총대를 메고' 늙고 초라해졌을 나를 잘 포장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 깊은 수수께끼를 풀어내려면.


떠나면서 나를 불렀을지 모른다. 난 듣지 못했다. 정말 듣지 못했다. 발가벗고 빨간 공중전화를 보자 친구가 생각났다. 적어도 반년 동안 주변의 아는 사람들과 끊고 지냈다. 왜 그 시간에 그놈이 보고 싶었을까?


같이 가자고 불렀던 것 아닐까. 난 그날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깨어있다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떠났을지 모른다.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이해하려 해도 이해되지 않아 이해하려는 내가 이해 안 될 때가 있다. 네가 부르는 순간, 어느새 나는 스무 살의 내가 되었다.


언젠가는 꼭 네 얘기를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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