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웨인 Jan 23. 2018

클래식을 외우는 남자

몰입한 암기는 감성을 카피한다

바다가 보이는 동해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가 하나뿐인 시골이었다. 교복을 입던 시절이다. 까까머리 고교생이 갈 곳은 없었다. 음악다방과 당구장이 유일한 꿈의 장소였다. 독사나 사스콰치라는 별명의 학생주임이 꿈을 막았다.


나는 수상한 인물이었다. 꿈의 장소에 빈번히 출입했다. 학주와 눈이 마주치면 당황하지 않았다. 익숙한 자기 학생이 아닌 것이다. 앳된 얼굴인데 태연했다. 학주들은 나를 잡지 않았다. 고개만 갸우뚱 지나쳤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고1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날, 시골집 뒷골목에 세련된 외양의 가게가 생겼다. '클레오파트라'라는 상호가 눈에 띈다. 궁금함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면 선반에 수십 개 비커와 LP가 보인다. 6개의 낮은 테이블이 고급스럽게 놓여있다. 비커처럼 보인 것은 싸이폰이라는 커피 기구였다. 촌에서 보기 어려운 세련된 공간이었다.


그녀가 메뉴판을 보여준다. 싸이폰 커피를 주문하고 태연히 담배를 피웠다. 자연스러워 누구도 제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자매가 하는 클래식 다방이었다. 큰언니가 주인이었다. 두 동생은 언니를 도와주었다. 메뉴판의 그녀는 전북대 국문과를 다니는 막내였다. 세련된 인테리어처럼 자매 셋은 예뻤.

 



"대학생이세요?" 둘째가 내게 물었다. 네 번쯤 갔을 때이다.

"고등학교 1학년인데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이없어 입이 벌어진 자매가 보인다. 그 날 이후 누나라고 부르며 친해졌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조건이었다. 청소를 도와주고 밥도 같이 먹었다. 눈만 뜨면 클레오파트라로 달려갔다. 예쁜 누나가 있는 꿈의 아지트였다.


나는 둘째가 맘에 들었다. 이유는 없다. 24살의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겨우 7살 차이지만 그녀에게 나는 남자가 아닌 아이였다.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남자로 느껴지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몰입한 암기는 감성을 카피한다.


클레오파트라는 클래식 다방이었다. 감상하는 모든 음악이 클래식이다. 클래식을 외우기 시작했다. 암기는 자신 있다. 감성을 어떻게 외우냐고? 몰입한 암기는 감성까지 카피한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다. 백과사전에서 클래식의 개념을 먼저 외웠다. 클레오파트라의 LP들을 하나씩 암기했다. 레코드 속의 해설서를 통째로 외웠다.


기준이 정해진 암기였다. 제목과 작곡가, 연도와 배경, 곡 해석. 순서와 Rule 이 정해진 암기는 쉽다. 다음 단계는 곡 자체를 외우는 일이다. 서곡부터 시작했다. 베토벤의 'Egmont' Op. 84-Overture'는 내가 외운 최초의 클래식이다. 듣고 감상한 것이 아니다. 악기와 리듬, 소리와 절조를 암기했다. 100번을 반복하면 외워지기 시작한다. 익숙해지니 전체 그림이 인화되었다.



소나타나 교향곡의 암기는 서곡과는 다르다. 음악적 소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무모한 고삐리에게 불가능은 없었다. 비발디의 사계를 악장별로 나눠 들었다. 수백 번 반복하니 인화된다. 3악장을 각각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무식한 시도에 깊은 이해는 없다. 분명한 목적만이 존재한다.


어느 부분을 듣던, 곡이 무엇인지 알면 된다. 방학 내내 클래식을 듣고 또 들었다. 기본 지식을 외운 상태에서 반복해 들으면 구별된다.


"누나! 이 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지?"

"베토벤 교향곡 6번 Pastorale, 5악장이네!!"


싱싱한 기억력으로 외우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해 여름, 그리고 겨울은 클래식이 전부였다. 오직 잘 보이기 위해, 그것도 연상의 여자를 꼬시기 위해 암기했다. 음악의 문외한인 17살의 고교생이 아니다. 클래식을 이해하는 한 남자로 변했다.



무식함이 귀여움으로 귀여움이 호감으로 변한다. 계곡에 놀러 간 여름의 끝 무렵이다. 세 자매와 같이 한 소풍은 즐거웠다. 계곡물에 젖은 얇은 셔츠는 고백할 용기를 주었다. 둘째와 둘이 남았을 때 입을 맞췄다. 연상의 입술은 달콤하고 깊었다. 따귀 맞은 기억은 없다.


이듬해 봄에 클레오파트라를 찾았다. 문이 닫혀 있었다. 닫힌 문은 방학 내내 열리지 않았다. 17살의 무모하고 풋내 나는 기억과 함께 클레오파트라는 봉인됐다. 누군가 클래식을 물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미열이 섞인 커피와 암기."라고.

작가의 이전글 늦지 않았어? ③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