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되지 않을 詩語를 말한다
"어떻니? 네가 보는 세상은?"
이 세상에서 탈것이 제일 싫다. 시골 아이라 그럴지 모른다. 원인을 알 수 없다. 바다와 계곡의 냄새에 익숙하다. 휘발유 냄새에 스치면 머리가 아팠다. 버스든 택시든 기차든 발판에 서면 어지럽다.
두 동생도 마찬가지다. 삼척에서 덕구온천까지 두 시간 길에 아버지는 열 번쯤 차를 세웠다. 셋 중 누군가 반드시 멀미를 한다. 멀미는 하품처럼 전염된다. 겨울에 차를 타는 것은 지옥 같았다.
어린 시절 삼척에서 강남터미널은 5시간이 넘게 걸렸다. 차에 오르면, 잠들어 도착 즈음 깰 수 있길 빌었다.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쉽게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어지러웠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멀미를 했다.
버스에 오르면 심호흡을 한다. 긴 호흡은 공포를 줄인다. 들숨과 날숨을 10초에 맞춘다. 신선이 될 지경이다. 호흡에 집중하면 경치는 죽는다. 대관령 아흔아홉 고개는 장관이다. 구비길의 장관은 악몽이다. 열구비를 지나면 언제나 멀미를 한다. 검정 봉다리에 고개를 박는다. 어린 진원진기를 써야 한다.
고개 들면 머리 끝은 아지랑이 투성이다. 이리저리 앉아도 현기증 투성이다. 숨 쉴 수가 없다. 봉다리를 든 채 의자 위에 부유한다. 혈관이 날아가 핏기 없는 화장을 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공포이다. 700리 길은 늘 지랄 같은 아픔이었다. 도망갈 데 없는 고통은 더욱 쓰렸다.
기록되지 않을 詩語를 말한다.
기차도 탈것이다. 차보다 낫지만 거북한 냄새에 멀미를 한다. 눈을 감으면 덜컹 규칙적인 소리가 잦아든다. 예상된 진동에 심장박동이 동기화된다. 홍익회 아저씨의 큰 목청이 메트로놈처럼 아련하다. 잠이 든다. 수면이라니? 행복하다.
투박한 냄새로 가득한 청량리역. 23:30분 출발 기차에 오른다. 07:50분 묵호 도착의 입석이다. 어디든 잠들 수 있을 것이다. 환승 시간까지 멀미와 추위를 버텨본다.
영주에 도착하여 어둠을 질러 영동선으로 갈아탄다. 어린아이에게 두려운 일이다. 숨죽인 채 영주를 떠나면 한숨을 내쉰다. 이완된 안도감에 스르르 잠든다. 이제 고통 없이 집에 간다. 아름답다 세상이.
어둠이 가실 무렵 눈 덮인 통리 협곡을 만난다. 나한정역 스위치백 지점이다. 기차가 서면 우두머리가 바뀐다. 뒤집힌 채 한 걸음씩 덜커덩 오른다. 잠결에 몸은 하늘을 향한다. 언제나 여기다. 동일한 시공에서 최면처럼 깬다. 취한 듯 몽롱하다. 태어나 첫울음을 터뜨리던 생경한 나를 만난다. 순백의 정신을 만난다.
최면에 걸려 차창 밖을 본다. 해발 700미터 통리협곡의 능선 레일이다. 어슴프레 발아래 세상은 마약 같은 백색이다. 눈 덮인 세계 까마득히 집과 굴뚝이 손톱 같다. 하얗게 세상이 잠들었다. 입을 열어도 말은 잊는다.
"어떻니? 네가 보는 세상은?" 풍경은 말을 건넨다.
달짝 힘겹게 입술을 움직인다. 최면처럼 혼자 말한다. 손으로 리듬을 만진다. 눈으로 아름다움을 더듬는다. 11살, 12살, 13살, 14살, 15살... 아이는 자라지만 아름다움은 한결같다. 고통도 외로움도 없다. 기록되지 않을 詩語를 말한다.
기억을 떠올린다.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탈것은 고통스러웠다. 겨울 방학이면 청량리역에서 밤기차를 탄다. 차를 소유하기까지 20년을 같은 길을 통해 집으로 간다. 어린 시절의 중앙선과 영동선은 달라졌다. 2012년, 스위치백은 역사 속에 사라진다. 통리의 흥전과 나한정역은 폐쇄되었다. 기억 속의 아름다움도 폐쇄된다.
기억을 떠올린다. 탈것의 고통과 함께 통리의 협곡을 더듬는다. 해발 700미터 위에 떠 있는 내 시선을 찾아낸다. 시선 아래 흰 아름다움이 남겨져 있다.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어린 시절 내 언어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