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한 행복이 낯설다
알던 남자가 있었다. 눈여겨본 적은 없다. 우연히 자리를 함께 했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저 타인. 관계없는 사람일 뿐이다. 연락할 일은 없겠지만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카톡으로 그의 프로필이 떴다. 8자의 한자가 그의 대문에 떠 있다. 밝히지 않은 속내 따위, 그를 알 것 같다.
만년필을 씻었다. 흐르는 찬물에 수백 번을 씻어도 잉크가 묻는다. 완전한 무결은 없다. 그늘에 말려 새 카트리지를 넣었다. 동일한 밀도의 검정이 순백보다 투명하다. 서걱거리는 필압에 가슴이 뛴다. 여백이 있다면 채우고 싶다. 욱신거릴 여지가 없도록.
묻는다고 사라질 것이면 거기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소멸이 있다. 고통이 없던 것처럼, 아픔이 없던 것처럼, 왜, 아직, 또, 어떻게, 의문이 사라진 것처럼. 나 아닌 것처럼. 이래도 되는 거야 묻는다. 이렇게 웃어도 괜찮을까 묻는다. 근사한 행복이 낯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