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되기를 기다리는 걸까. 슬프지 않은 지 오래됐다. 빛의 양을 보고 시간의 흐름을 안다. 손이 닿는 곳, 그 문을 열면 밖이다. 굳이 열 생각은 없다. 감정의 기복은 시간에 반비례한다. 그렇게 믿는다. 거울 속 모습도 속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나는 슬픈 걸까.
저녁 즈음 문자를 받았다. 친구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손 닿는 문도 열지 않는데, 먼 곳에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해마다 고향에 가면 보던 불알친구, 관계를 끊으면서 그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십 년 만에 받은 그의 문자는 부고였다. 슬픔이 조그맣게 머물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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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나란한 세 집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안경점, 가구점, 서점 아들. 형제처럼 늘 붙어 다녔다. 유치원도 초등학교도 같은 반이었다. 3학년 때 친구 하나가 누나들이 있는 서울로 유학을 갔다. 4학년 때 나머지 한 친구도 떠났다. 촌 아이들이었다. 유학이란 말이 어려운 시절. 서울은 외국이나 다름없었다.
방학이 다가오면 친구 집으로 달려가 언제 오는지 수십 번 물어보곤 했다. 서울이 궁금했고 친구들이 그리웠다. 매일 부모님께 서울로 가겠다고 졸랐다. 5학년 때 서울로 전학했다. 부모님과 떨어져 느낄 외로움은 없었다. 호기심 가득한 서울이었다. 마실 다니듯 옥인동으로 혜화동으로 친구를 만나러 다녔다. 두려움보다 설렘이 가득했다. 형제보다 기꺼운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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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이 되고, 아무렇지 않았다. 나를 돌아보기도 버거운 시간이었다. 그런 줄 알았다. 밤이 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누군가 세차게 후려치는 것 같았다. 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간다고 반겨줄 것 같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희석될 거다. 그냥 마음만 불편할 뿐이다. 후회는 대수롭지 않으니까.
밤 11시가 넘어 출발했다. 아침이면 발인이다. 도착할 즈음, 상주인 친구는 웅크리고 잠시 눈 붙일 새벽일지 모른다. 민폐일까. 마지막 휴게소에서 바다를 봤다. 어둠 안에 현실이 보였다. 마음도 옷차림도 초라하다. 고여 있던 불편함은 사라졌다. 고향에 다가왔구나. 인사할 수 있겠구나.
새벽, 장례식장은 여전히 낮은 곳에 있었다. 십 년 만에 보는 친구는 안개처럼 낯설다. 그리움은 도망가지 않았다. 어머님 사진을 보자 알 수 없는 설움이 밀려온다. 잃은 시간을 도려낸 채 대화를 나눴다. 잘 지내니. 응, 나는 그냥 그래. 너는 잘 지내니.
“넌 참 나쁜 친구야.”
“너도 널 잘 모를 거야.”
“넌 교묘하게 사람 속을 후벼 파.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야.”
“엄마 돌아가시면 연락해.”
연이어 그가 말했다. 관계를 끊은 이유를 십 년 만에 들었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기꺼워하지도 않았다. 표정 없는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 어렸을 때 너는 그랬어. 중학교 때 너는 그랬어. 스무 살, 대학교 오픈 하우스 때 찾아온 너는 그랬어.
내 기억과 그의 기억은 달랐다. 오래전부터 나는 그에게, 질 나쁜 친구였다. 수십 년만에 진실을 알게 됐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몇 달동안 감정이 다 하기를 기다렸다. 표현하지 않았고 덜려 하지 않았다. 남은 것이 없기를 바랐다.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올 수 있었다. 슬프지는 않았다. 울컥하는 나를 느낀 순간, 눈물이 났다. 영원히 소진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 절망이 무서워 울었다.
뵙지 않으려 했는데, 익숙한 골목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새벽 기도를 다녀오신 엄마는 많이 놀라셨다. 한껏 웃으며 안아드렸다. 죄송해요. 짧은 인사를 하고 돌아서 아버지를 보러 갔다. 9년 만에 아버지 묘 앞에 앉았다. 많이 울었다.
소진되지 않음을 안다. 바닥 어딘가, 그래도 끝은 있을 거다. 돌아가는 길에 벚꽃이 가득하다. 흐드러지게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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