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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에 대하여 3

고추장 수제비의 낭만

by Moon

외부 미팅이 마침 본가 근처서 잡혔다. 어머니만의 고추장 수제비를 맛본 지 석 달이 훨씬 지난 시점이어서 집에 들르겠다고 일찌감치 연락했다. 고추장 수제비 먹으련다고 주문도 넣었다. 미팅이 어떻게 진행되고 끝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난 수제비 먹을 생각에 조급했다.

본가에 도착해서는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여느 집 아들내미 포즈로 마루에 드러누웠다. 어머니는 이미 멸치 국물 내고, 밀가루 반죽까지 다 만들어 놓고 나만 기다리고 있었다. 누운 아들놈에게 물까지 떠다 주는 어머니 서비스도 그대로였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익숙한 퐁당퐁당 소리가 나 고개를 들어 보니 어머니가 반죽을 손으로 떼 막 끓고 있는 국물 속으로 넣고 있었다. 사실 지난달에도 비슷한 계기가 있어 본가에 들렀지만 수제비를 먹지는 못했다. 그때 어머니는 항암 주사를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손이 저려 도저히 반죽이 안 되겠다고 미안해하셨다. 한 달 만에 기력이 많이 회복된 듯한 손놀림이라 다행이다 싶었다. 많이 회복하셨네요, 몸은 좀 어떠세요, 자주 못 와서 미안, 이런 말을 했으면 좋으련만 아들 입은 무겁기만 하다.

이윽고 수제비가 대접으로 나왔다. 이 대접은 학생 때부터 늘 사용하던 내 전용 국그릇이다. 아내가 처음 인사 와 식사를 했을 때, 이 그릇을 보고 소스라친 적이 있었다. 이건 차라리 소여물 담기에 적합해 보이는 크기라고 표현했었다. 그건 어머니와 나 사이의 오랜 이야기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어머니는 살 좀 빼라고 매일 같이 닦달을 하면서도 늘 그 대형 그릇에 각종 음식을 주셨다. 먼 타지에 살고 있어 한국에 계시던 외할머니 장례식에 가지 못했을 때 화장실에서 물 틀어놓고 혼자 꺽꺽 울고 나서도, 그놈의 암 때문에 복수가 차오르는데도 6인실 아니면 안 가겠다고 집에서 미련하게 버틸 때도, 어머니는 그 그릇에 음식을 채워 방에 배달해 주셨다. “너 배고플 때를 내가 알지 누가 아니.”

결혼해 분가할 때도 그 그릇은 집에 남겨두기로 했다. 그래도 집에 와서 밥 먹을 일 있지 않겠냐는 게 어머니의 이유였다. 나로서도 내 집 말고 이 세상 어딘가에 내 전용 그릇이 또 있다는 건 든든한 일이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난 그저 그 그릇이 나에게 당도했을 때 깨끗하게 비우기만 하면 된다. 그게 어디든. 언제까지든.

학창 시절부터 함께해 온 그 그릇에 두 번째 수제비를 담으면서 보니 이빨이 살짝 빠져 있었다. 어머니도 눈을 한껏 찡그린 채 그릇을 보더니 “그러게, 금이 갔네.”라고 동의하며 한 마디를 잇는다. “늙은 게 꼭 나 같구나.” 난 든든한 존재 둘이 한꺼번에 쇠약해지고 있어 기분이 묘했다. 이 그릇을 채우고 비울 날이 아직 더 남아 있기를 나도 모르게 기도했다.


회사로 복귀해야 해서 일어서는데 어머니가 사과를 갈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배경 삼아 그동안 그 큰 그릇에 담겼던 어머니 음식들이, 아니, 어머니의 삶이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그 세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당해야 했던 어려움과 가난을 겪었을 뿐인데, 어머니는 그걸 자기 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식 향한 그 근본 없는 미안함은, 그 대형 그릇의 밑바닥에 언제나 깔려 있는 기본양념이었다. 그 위에 담겼던 수북한 음식들은 어머니의 대화법이었다. ‘더 못해줘서 미안하다.’


어렴풋하나마 나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다정하게 말하는 법은 몰랐어도, 그 마음을 밀어내지 않을 줄은 알았다. 그래서 소처럼 꾸역꾸역 먹고 또 먹었다. 어머니가 채움으로써 말을 걸면, 나는 비움으로써 대꾸했다. 아들이 가정을 꾸리는 통에 비어버린 집에서, 그 그릇이 정말 필요했던 건 어머니였을 테다.

먹을 걸 다 먹었다. 문을 나섰다. 이 빠진 그릇이 보인다. 그것은 남겨진 어머니 옆에서, 아들 같아야 하는 존재였으나, 생의 많은 날들이 이미 지나버린 어머니와 오히려 닮아 있었다.



* 십수년 전 글을 고치고 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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