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앞 재래시장의 낭만
1.
집 근처에 재래시장이 하나 있다. 꼼꼼하게 비교해 본 건 아니지만 이곳 가격은 나쁘지 않다. 바로 길 건너에 있는 커다란 마트에서 2000원 주고 산 냉이가 여기서는 500원이다. 집 근처 야채가게에서 12000원 하던 딸기 한 바구니가 여기서는 5000원이고, 냉동 삼겹살도 1근에 4800원이다. 그러니 날 잡아 장을 봐야 하는 때에는 조금 걸을 각오를 하더라도 이곳으로 온다.
2.
시장 중간 즈음에 있는 떡볶이 가게 아저씨는 우리 부부가 두고 나온 칼갈이를 주려고 추운 가게 문밖에 서서 지나가는 손님을 관찰하고 계시던 분이다. 장을 다 보고 되돌아 나오는 길, 아저씨가 우리를 알아보시고 막 달려오실 때까지 우리는 칼갈이를 놓고 온 것도 몰랐다. 아저씨는 “이거 나도 써봤는데, 날이 한쪽씩만 갈리니 번갈아가며 갈아야 한다.”는 조언을, 아까 튀김 위에 부어주시던 떡볶이 조각들처럼 곁들이셨다.
3.
조금 더 들어가면 번데기 아주머니가 있다. 놀이공원에 갈 때 번데기 한 컵 안 들고 들어가면 서운해하던 아내지만 결혼 후 급상승한 절약 정신 때문에 번번이 지나치던 분이다. 하루는 아내가 모처럼 군것질을 결심했다. 그리고 아주머니에게 번데기 천 원어치를 주문했다. 그런데 아주머니 표정이 영 찝찝하다. 그리고 재차 확인한다.
“지금 이거 달라고요?”
“네, 천 원어치만요.”
어쩐지 아주머니가 든 숟갈이 곤란하다. 판매의 의지가 발동하지 않는 모양새다. 아내는 눈치가 빨랐다.
“아, 이거 식었나요?”
“네. 정리하려고 불 끈 지가 좀... 다음에 와서 드세요.”
눈 딱 감고 종이컵만 채워 넣으면 되는데, 아주머니는 식었냐는 질문에 곧이곧대로 ‘네’라셔서 우리는 뒤돌아 웃었다. “장사 참 귀엽게 하신다, 그렇지?”
4.
그 옆에는 잘 생긴 총각네 정육점이 있다. 아내가 지나칠 때면 마치 두고 온 첫사랑 만난 듯이 얼굴을 붉히고 걸음을 재촉한다. 언젠가 장모님과 아내가 거기서 고기를 산 적이 있는데, 그 총각이 아내보고 동안이네 어쩌네 칭찬을 하길래 장모님이 옳다구나 아내에게 “칭찬 들었으니 이 총각 여자나 소개해주라”라고 하시며 덤을 뭉텅이로 얻어 오신 다음부터 계속 그런다. 아직 소개팅을 못해준 때문이다. 아내와 장모님이 괜히 미안한 살점들을 얻어먹고 갚지를 못한 통에 나까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운동을 하게 된다.
5.
시장 안쪽에서 오랫동안 닭집을 하고 계시는 아주머니는 장모님의 오랜 친구다. 가게 앞을 지나칠 때마다 혹시나 장모님 만날까 흘끗흘끗 들여다보는데, 그럴 때면 그 분과 눈이 마주친다. 유리 너머로 인사하자니 버릇이 없는 것도 같은데 그렇다고 그냥 인사만 하러 들어가기도 이상해 어정쩡하게 고개를 꾸벅 숙인다. 장모님과 같은 나이에, 장모님과 똑같이 홀몸으로 남매를 키우신 것 때문인지 장모님과 무척 친하신 아주머니는 얼마 전 천막을 내리시다가 지지대가 갑자기 떨어지는 바람에 지나가던 행인의 이를 부러트리셨다. 더 놀란 아주머니께서 고개를 거듭 숙여 죄송하다, 변상은 꼭 해드리겠다 사과를 하셨는데도 그 행인분은 남편까지 또 한 차례 데리고 와서 가게를 거의 뒤엎을 정도로 난리를 쳤다. 시장에서 거의 평생 장사를 하셨으면서도 억세게 사는 법은 배우지 못하셨는지, 남편이란 종자 대하는 법을 잊으셨던 건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쩔쩔 매고 있던 아주머니 옆에 마침 놀러 와 계시던 장모님이 안 물어주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악을 쓰고 행패를 부리냐고 대신 버럭 화를 내시고 싸우셨다. 친구의 남편이 되어 주셨던 것이다. 결국 돈 200만 원 정도를 물어주는 걸로 마무리되었다며, 누군 남편 없어봤냐며 씩씩거리시며 당시 상황을 전달하시던 장모님은 한 동안 그 집에서만 닭을 사 먹자고 하셨다. 나이 들면 부부가 친구처럼 된다는데, 오랜 친구는 부부처럼도 되나 보다.
6.
얼핏 보니 시장 초입에 서 있는 공중전화 수화기가 제대로 놓여 있지 않았다. 아내가 전화기 안에 아직 20원이 들어있다며 반가워한다. 누군지 몰라도 남은 20원을 무심히 내리지 않은 인심 자체에 신이 난 아내는 냉큼 부스 안으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놨다 한다. 그랬다. 공중전화가 곳곳에 있던 시절에는 자기가 통화하고 남은 , 뒷사람 쓰라고 수화기를 일부러 제대로 걸어놓지 않았었다. 그게 낭만이었다.
부스 안 아내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가지고도 지금 여기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꼭 해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데 얼마를 더 넣어야 할지 계산이 안 된다. 예전엔 공중전화비가 얼만지 시세를 다 외우고 다녔는데, 지금은 20원 남은 것만 보고 얼마를 더 넣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 마침 주머니에 동전도 없어 그냥 핸드폰으로 사진만 찍고 나온다. 공중전화 대대로 구전처럼 전해 내려오던 차액 남기기의 이야기가 핸드폰 안으로 디지털화되어 들어간다. 또 어떤 옛것을 우리는 사진으로만 볼 수 있을까, 온 김에 시장도 미리 사진으로 찍어둘까 과장된 고민을 한다.
7.
집에 와 그 떡볶이 가게 아저씨 설명처럼 칼날을 한쪽씩 갈아 쓰고 있다. 번데기는 언제 먹을 수 있을까, 확실하지 않다. 총각네 정육점은 여전히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여자 소개 못한 우리는 다른 정육점에서 고기를 산다. 멀리서 가끔 보지만 총각은 여전히 인물이 좋다.
장모님 친구분은 월말에 가게문을 닫으신단다. 자식들 다 컸으니 쉬시고 싶으신가 보다. 장모님은 그 사람 쉬다 보면 몸살 날 거라고 미리 걱정이시다. 그 공중전화는 그때의 20원을 거름 삼아 누군가의 목소리와 사연들을 활짝 피어냈을 것이다. 저금하듯, 다음에 지나가면 그냥 20원 정도 넣어두어야지, 아내는 혼잣말을 한다. 그 시장에서 난 글을 하나 얻었다. 나쁘지 않은 거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