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의 낭만
아이들이 한참 어렸을 때의 일이다. 딸아이를 씻기려고 욕실에 들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마루에 혼자 남겨진 아들이 언제 나올 거냐고 물었다. 금방 나올 거니까 문이나 닫아라,라고 말하고 난 먼저 들어가 목욕용 의자에 앉았다. 딸아이는 욕실 문을 지나 입장 중이었고, 아들은 누나 뒤로 문을 밀었다. 마침 딸아이는 미끄러운 욕실 바닥을 조심스레 딛느라 손으로 벽을 짚었는데, 하필이면 그게 경첩 부분이었다. 그 위로 문이 닫혔으니, 당연히 아이가 자지러졌다.
다행히 아들 녀석이 문을 건성으로 닫아서 손가락은 무사했지만,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우는 아이를 얼른 안아 들고, 놀란 아들 녀석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아빠가 문 닫을 때 살살 닫으라고 했어 안 했어!” 아들도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울고 있는 딸아이도 다그쳤다. “넌 아빠가 문 사이에 손 집어넣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했어!” 아이의 울음이 커졌다.
나도 주저앉았다. 그리고 딸아이를 꼭 껴안았다. 우는 막내도 같이 안았다. “괜찮아? 우리 딸 괜찮아? 미안해. 아빠가 미안해.” 아이들이 더 서럽게 운다. 딸아이 손가락 통증이 좀 가라앉을 때까지 우리 셋은 그렇게 화장실 앞 바닥에 앉아 꼭 껴안고 한참을 있었다. 그 순간에 봤던 움푹 파인 아가의 손가락 이미지는 아직도 선명하고, 아침에 혼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러 화장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노라면 그 작은 손가락이 생생하게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안해.. 미안해..’를 중얼거리게 된다.
어느 날은 둘째와 같이 자다가, 갑자기 녀석에게 모질었던 일이 생각났다. 아직 아이가 어렸을 때, 새벽 네 시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았던 밤이었다. 달래다 달래다 되지 않아 결국 마루에 있던 유아용 침대에 올려놓고 “너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니? 나 그냥 잔다. 너 알아서 해”라고 한 후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갔었다. 아이 달래러 나간다는 아내도 못 나가게 했다. 초기에 버릇을 잡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사실은 화가 났던 것 같다. 아이는 어두운 마루에서 혼자 한참 앵앵 울다 잠들었다.
이제는 그때를 기억할까 싶을 정도로 꽤 자란 둘째였다. 눈을 감고 잠든 아들 쪽을 돌아보고 누워서 ‘미안해, 아빠가 미안해’하고 속삭였다. 그러자 잠든 줄 알았던 녀석이 눈을 반짝 뜨더니 혀가 매우 짧은소리로 ‘뭐가 미안해요?’하고 되물었다. 한참 꿈속인 줄 알았던 녀석이 반응을 해서 놀랐고, 사과를 이해했다는 게 놀라웠고, 뭐가 미안한지 질문할 줄 안다는 게 놀라웠다.
보통 요만한 나이의 아이들이 보여주는 놀라움은 부모에게 ‘귀여움’이란 감정으로 변환되어 입력되기 때문에 난 자다가 말고 녀석을 들쳐 안고 볼을 쪽쪽 빨기 시작했다. 아들이 까르르 애기 웃음을 웃는다. 아내가 ‘안 자고 뭐 하냐!’고 소리를 질러서 두 남정네는 다시 등을 바닥에 딱 붙였지만, 아들은 계속 궁금했다. ‘뭐가 미안해요?’ 그래서 ‘응, 아빠가 너 작은 아기였을 때 야단치고 마루에 혼자 재웠거든.’ 아들은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지금은요?’하고 물었다. ‘지금은 그래서 아빠랑 같이 자잖아.’ 아들이 빙그레 웃고 내 팔을 꼭 껴안고 뽀뽀를 한다. 아빠는 또 미안했다.
독신주의로 한참을 살았다. 눈 떠보니 그때의 나는 사라지고, 좋은 아빠가 되는 게 삶의 가장 큰 목표가 된 놈이 덩그러나 남아 있다. 근데 영 쉽지가 않다. 대신 자식들을 향한 부모의 말에 ‘미안하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농도 짙게 섞이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의 싹을 돋우기 시작한다. 잔고 20만 원인 상태에서 결혼하자고 졸라 승낙을 얻어낸 후 처음 아내를 집에 데려갔을 때 아직도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목돈(엄마에겐 목돈, 여느 전셋집 주인들에게는 푼돈)을 우리 앞에 내놓으셨던 엄마도 ‘미안하다, 이것밖에 없어서’라고 했다.
여느 할머니 나이였던 엄마는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아끼는 게 버는 거였다. 전기세가 아까워 자식이 밤늦게 퇴근할 때까지 아무런 불빛도 없이 집 안에 가만히 앉아만 계셨다. 결혼식 날 신혼여행을 출발하는 며느리 손을 잡고서도, 20년이 넘은 삼촌 차를 얻어서 나한테 키를 주시면서도, 내게 업혀서 마지막 병원행을 하시면서도 엄마의 대사는 ‘미안하다’였다. 그래서 그런지 의사가 마지막 인사를 하시라고 자리를 비켜줬을 때 내가 엄마 머리맡에서 할 수 있는 말도 수많은 미안해요들 뿐이었다. 아직 해드릴 게 더 있으니, 힘내요 엄마, 이런 말도 못 했다.
그 마지막 인사가 고약하게 입에 붙어버렸다. 입관식 때 가볍디가벼운 엄마를 안고도, 엄마 유골을 차가운 납골당에 홀로 밀어 넣으면서도, 집에 돌아와서 수년을 엄마 없이 살아도, 그 말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아무리 미안해도 미안함을 풀 대상이 없어졌으니, 죄책감 비스무레 한 것이 자리를 차지했다. 가사가 날 찔러와 부를 수 없는 노래들이 많아지고, 마음이 조각나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려야 하는 영화 장면들이 늘어나고, 도무지 아파서 읽을 수 없는 글들이 생겨났다. 모든 것들을 조금씩 줄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누릴 자격이 없었다. 그럴 여건이 된다면, 그리고 이 미안함이 해소만 될 수 있다면, 나도 엄마가 자식들 기다리며 앉아 계셨던 그 어두움을 계속해서 마주하고만 싶었다. 그 어두움 속에 이 깊은 죄책감을 해소할 길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해결의 실마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온다. 내 아이를 향한 ‘부모의 죄책감’이 바로 그것이었다. 모두가 쌕쌕 잠들어 있는 아침, 고요한 화장실에서 아이들에게 어제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는 소리가 나올 때, 난 내 이기적인 마음이 누군가를 이토록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아가들 어렸을 때 사진을 넘겨보다가 내 성숙지 못했던 모습들이 떠올라, 괜히 그 시절을 지나온 내 새끼들이 뭉클히 고마울 때, 난 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라는 명대사의 깊은 맛을 본다.
그런 미안함이 어느 정도 쌓였을 때, 난 엄마 마음에 나에 대한 원망이 하나도 없었으리라는 걸 ‘반짝’하고 깨달았다. 엄마는 엄마 나름의 사랑을 엄마 방식대로 더 주지 못했던 그냥 흔한 엄마였던 것이다. 더 사랑할 수 없어, 미안하다는 표현만 계속 가슴속에 쌓아오던 그 흔한 부모상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던 미련한 노인네, 엄마. 엄마의 그 사랑을 인정한다면, 내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내가 그 죄책감을 갖는 건, 내 평생 받아온 엄마 사랑에 대한 모욕이었다.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그러하듯 말이다. 완벽한 사랑에 죄책감 같은 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언젠가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 그 이상의 말을 해주고 싶고, 그런 말을 언젠가 찾아내거나 만들어보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왜 난 그 말이 이미 우리 엄마 입에 붙어 있었다는 걸 몰랐을까. 나를 낳고 너무 신기해서 쳐다보느라 잠도 못 주무셨다던 엄마가, 사랑 외에는 자식들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할 이유가 없었는데, 왜 몰랐을까. 엄마는, 그 마지막 날 내가 했던 미안해,라는 말이 사실 사랑해였다는 걸 알아들으셨을까. 나도 엄마 한 번도 원망한 적 없고, 한 번도 모자란 적 없었는데, 엄마는 내 마음 알고 계셨을까.
천국에서 만난다면, 우리 미안하다 하지 말고 사랑한다고 말해요, 엄마. 그만한 말이 없더라구.
*십 수년 전 글을 줄이고 고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