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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에 대하여 22

식탁의 낭만

by Moon

아내가 혼수로 가져온 식탁은 아담했다. 집이 좁기도 했고, 두 사람 먹을 국 하나, 밥 두 공기, 반찬 한두 가지 올릴 수 있으면 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식탁의 네 면을 다 쓸 필요도 없어서 한 면은 벽에 붙여놓았다. 가끔 친구들이나 다른 식구들이 놀러 오면 베란다에 있는 큰 상을 펴면 되었다. 식탁이 작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먹는 양이 많든 적든 그 면적 안에서 다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식구가 늘었다. 그 늘어난 식구가 식탁의 3면 중 한 면을 차지하기 시작하더니 곧 식탁 면적 전체를 장악했다. 처음에는 자기 손도 못 뻗어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입에 넣어주는 것만 꼬박꼬박 병아리처럼 받아먹던 녀석인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내와 난 녀석의 반대쪽, 그러니까 식탁이 벽에 꼭 붙어 있는 면으로 국이며 반찬이며 밥을 죄다 몰아놓고 허리까지 삐딱하게 앉아서 - 엉덩이는 아이 쪽에 가깝게, 손과 입은 반대 편 벽 쪽에 가깝게 - 밥을 먹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허리 통증이 노화의 방증인 줄 알았는데, 이건 어떤 만화 속에서 거인에 쫓겨 성벽 안으로 내몰린 인류마냥 소인 하나 어쩌지 못해 어정쩡해진 내 식사 자세 때문이었다.


자기 숟가락을 쥐고 버젓이 한 자리 차지한 이 무시무시한 꼬마는 밥 먹는 내내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했다. 숟가락으로 식탁 유리를 깨부술 듯이 쳐대는 건 기본이었다. 드럼 비트 위로 기타와 보컬이 깔리듯, 녀석의 난폭한 숟가락질은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밥풀과 계속해서 뭔가를 손에 쥐어달라고 혹은 입에 넣어달라고 떼를 쓰는 ‘어! 어!’ 소리를 덧입었다. 굉음 합주를 듣다 보면 정신이 어질어질해질 지경이었다. 아내나 나는 그런 아이 손에 장난감을 쥐어주면서, 식탁 바닥에 떨어진 밥풀들을 그러모으면서, 아이 입에 뭔가를 넣으면서, 스스로의 밥도 챙겨 먹어야 했다. 헷갈렸다. 어떤 날은 서로의 입에 이상한 것을 넣을 때도 있었다.


어느 날 난 박차고 일어서 삐딱해진 허리를 곧추세웠다. “부모라면 당연히 식탁을 다 쓸 수 있어야 하잖아!” 그리고 국과 반찬 등을 제자리, 즉 식탁 한가운데로 복귀시키고, 아이를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자, 부모 먼저 먹는 게 예의지. 넌 좀 기다려야겠어.” 그러나 아이의 어마어마한 울음소리에 난 다시 벽 쪽으로 허리 비스듬하게 내몰렸다. 제자리로 돌아온 아이는 숟가락을 들고 날 보더니 히죽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신혼집용 말고 진짜 식탁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본가에 있는, 쓰지도 않던 식탁이 아쉬웠다. 부엌 한가운데에 있던 그 식탁은 늘 늠름한 기둥 같았다. 엄마는 별별 반찬을 자랑스레 올려놓음으로써 그 넓은 면적을 꽉꽉 채웠었다. 전역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동생도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식탁이 제 노릇을 충분히 했다. 엄마의 식탁은 요란하고도 듬직했다.


그러나 온실효과에 빙산 녹듯 식탁은 아주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자식들이 사회인 노릇 한답시고 식사 시간을 맞추지 못하니, 그 큰 식탁은 1인용으로 전락할 때가 많아졌다. 급기야 엄마는 아예 바쁜 자식들 방으로 국에 밥을 말아 배달을 하셨다. 그 광활한 식탁은 엄마 전용이 되었다. 엄마 전용이 되어버린 물건들의 운명이 다 그렇듯, 그 식탁도 미안한 얼굴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쁨이란 무지막지함을 내세운 자식들로부터 자기의 영역을 조금씩 내주었다. 부엌 가운데서 벽 쪽으로, 벽 쪽으로.


나는 그 뒷걸음을 한참 후에서야 알아챘다. 내 고유의 영역이 자식이라는 불가항력에게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한 때였고, 이미 본가의 식탁은 벽에 딱 붙어있던 때였다. 손녀를 안고 집에 가 오랜만에 엄마 밥을 먹으려고 하니, 아내와 나 맞은편에 엄마가 앉을만한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의자는 있었는데 벽 때문에 뒤로 뺄 수가 없었다. 식탁을 다시 가운데로 옮기려 했더니 엄마는 손녀를 안아 들고는 “너희 먹을 동안 난 애기 볼게. 너희 다 먹으면 먹어도 돼.”라고 하셨다. 손녀 바보이기도 하셨고, 자식들 먹는 걸 지켜보는 게 더 즐거우셨던 것도 같다. 방으로 방으로 음식 배달을 하셨을 땐 자식들이 먹는 걸 볼 수가 없으셨는데, 그 시간을 어떻게든 보상받고 싶으신 것처럼.


엄마의 자랑이 펼쳐지던 공간이 언제 이렇게 초라해졌을까 궁금했다. 당신 방도 없이 마루 소파 위에서 마지막 십여 년을 보내신 엄마는 자기의 자랑과 즐거움마저 한 켠으로 치우셔야 했던 것이다. 엄마라면 부엌 정도는 넓게 써도 되고, 자식을 식탁으로 불러 모아도 됐는데, 항상 가난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셨던 엄마의 마음이 그런 권리 행사를 막았던 것은 아닌지. 미련한 사람. 그렇게 해놓고 가버리면 남은 자식들 후회는 평생 어떻게 하라고. 진작 그 식탁을 앞으로 당겨놓지 못한 내가 아이 앞에서 무슨 부모 권리를 운운할 수 있을까.


자식이 점점 내 공간을 차지한다. 아니, 나 자체를 잠식하고 있다. 이건 비단 식탁의 문제만이 아니다. 마루는 이미 아이의 놀이방이고 난 아내 옆에서 자본 지가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엄마를 잃은 자식의 자리도, 이 작은 녀석이 차지한 덕에 난 별로 슬프지 않다. 가끔 이런 청승맞은 글 쓰는 밤을 빼놓고는.


자식이 뭐라고, 아내와 난 가끔 초음파 사진부터 쭉 꺼내놓고 아이가 자란 모습을 보고 깔깔댄다. 못 생긴 게 용 됐다, 어렸을 땐 남자 얼굴이었다는 둥 부모답지 않은 험담이 주를 이룬다. 아마도 정면으로는 맞설 수 없어 부모는 평생 뒤에서만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이렇게 빨리 시작할 줄은 정말 몰랐다. 뒤통수처럼 닫힌 내 방문 바깥에서 엄마는 무슨 음식을 혼자 드셨을까. 아마, 저 녀석이 언제 저렇게 커서 일까지 하누, 하셨겠지. 하지만 난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마치 후딱 커버린 내 자식의 성장 과정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기적은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딱히 분하다거나 세상이 원망스럽다거나 나 자신이 미운 건 아니었다. 그냥 기적이 한 번쯤은 우리 가족에게 있을만한데 아직은 때가 아닌가 싶었다. 아쉬웠다. 하지만 지금에서 아내와 아이의 옛 사진을 볼 때 난 기적이 이미 다른 모양으로 찾아왔다는 걸 깨닫는다. 엄마가 누린 기적도, 병의 완치가 아니라 나였을 게다. 내 작은 거인이 나에게 그렇듯. 자식을 낳고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지켜봤다는 게 어디 우리 엄마뿐일까. 이미 우리도 이런데. 우린 어쩌면 이미 기적을 누리는 법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우리 가정의 기적은 녀석의 첫걸음이었다. 그것도 세 발짝. 기쁘기도 하고 경악스럽기도 했다. 처음 이 녀석이 아기 침대를 넘던 날, 우리 부부는 이 날이 올 것을 직감했고, 영역 싸움에서 질 것을 미리부터 두려워했다. 그건 우리 둘 다 엄마의 영역인 줄도 모르고 마구 땅따먹기를 하던 자식의 기억이 있어서였으리라. 녀석은 이제 두 발로 가속하여 자기 영토를 확보하려 한다. 나의 성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미 항복인데.


*십여 년 전 글을 줄이고 다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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