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뜽삼이 Jun 04. 2023

내 안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가

사람마다 일기를 쓰는 이유는 가지각색이다. 

그 날 그 날 에너지가 느껴지는 대상에 대해 기록할 수도 있고, 먹은 음식들이라 했던 활동들에 대해 써볼 수도 있다. 즐거웠던 일, 슬펐던 일, 기뻤던 일을 남겨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지 벌써 열흘 정도 된 것 같다. 쓰면서 알게된 것은, 나는 나의 '생존 규칙'을 인지하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일기 역시 내가 하루 중 발견한 생존 규칙을 기록하기 위해 쓰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생존 규칙이란, 나의 어린 시절 말 그대로 내가 생존하기 위해 만들고 현재까지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규칙들을 의미한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내 안에 흐르고 있는 생존 규칙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생존 규칙'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와인버그의 책 「테크니컬 리더」에서 그 개념을 접하게 된 것이다. 가족치료의 선구자 버지니아 사티어가 제시한 사티어 모델 안에 포함된 개념인데, 나 자신, 나아가 남들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듯하여 계속해서 기록해보려 한다.
오늘 내가 발견한 생존 규칙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정오가 다 되어서야 비로소 눈을 뜬 우리 둘. 여행을 갈 예정이었으므로 서둘러 점심 먹을 준비부터 시작했다. 굳이 설거지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나는 아내에게 넌지이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그냥 밖에서 간단히 해치우고 들어올까?" 

그러나 어림도 없다는 듯 그녀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아니 지난 번에 먹다 남은 오리고기 있잖아. 그거 먹자"


간단히 전자렌지에 데울지 아니면 후라이팬에 옮겨 가스불로 데울지를 고민하였다. 지난 주말에 아내의 친정집에서 방대한 양의 숙주나물을 받아온 것이 있는데, 오늘 먹을 오리고기에 숙주나물을 추가하자는 데 우리 모두 동의하였다. 이렇게 된 김에 내가 후라이팬으로 고기를 데우며 약간의 양념을 추가하기로 하였다.


비록 오리고기 자체에 기름이 많다고는 하나, 가스불에 후라이팬을 올리는 순간 으레 따라오는 것이 있다. 바로 식용유다. 식용유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아보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니. 나는 순간 짜증이 확 났고, 아직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나의 속에 출몰한 '짜증'이라는 악마 녀석과 끊임없는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기려고 애쓸수록 역설적으로 승리에서 멀어지는 것이 바로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나는 무의미한 '게임'에 빠져있기보다는 내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하는지 그 안에 숨은 '생존 규칙'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생존 규칙을 미처 탐색하기도 전에 또다른 놈이 고개를 쳐들고 나를 찾아왔다. 연속으로 두 놈을 상대하는 것은 아무리 '구도자'를 자처하는 나일지라도 여전히 버겁다. 열심히 후라이팬 조리를 마친 뒤, 후라이팬을 통째로 들고 식탁으로 왔는데 왠걸, 후라이팬 하나 놓을 자리도 없이 각종 서적과 잡동사니로 빼곡한 것이 아닌가. 해소되지 않은 감정이 기어코 현실 밖으로 튀어나왔다.

"자기야, 일단 밥 먹을 준비부터 해야지..."

삐져나온 나의 부정적 에너지를 감지한 아내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무어라 대답하였는데 결코 수용적이진 않은 대답이었다.


그렇게 함께 식사를 시작하였고, 나는 내면을 탐색하느라 잠시 침묵을 유지한채 묵묵히 밥만 먹고 있었다. 아내는 내게 서운하냐고 물었고, 나는 서운한 것이 아니라 나의 생존 규칙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고 대답하였다. 그 때 내가 대답했던 생존 규칙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생존 규칙 1) (내가 알고 있는)물건들은 항상 제자리에 있어야만 한다.
생존 규칙 2) 내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아내도 무언가 그에 상응하는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를 좀 더 가벼운 '지침'으로 바꿔보자.

지침 1) 어떤 물건들은, 경우에 따라 제자리가 아닌 곳에 위치해있을 수도 있다.

지침 2) 내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아내가 원하는 경우에만 그에 상응하는 준비를 하고 있을 수 있다.


생존 규칙을 내 입으로 정리하고, 이를 다시 지침으로 바꿔보는 과정을 거치고 나니 '거짓말 같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여기에서 깨달은 명불허전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변화의 출발은 '인지'다.


내 안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가.

그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원하는 변화에 가까워진다. 올해 나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매일 하나 이상의 생존 규칙을 알아차린다.


p.s. 오늘 도서관 대출창구에서 직원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는데 무반응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 즉시 나의 규칙을 인지하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23.06.03

작가의 이전글 타인의 불행은 나의 행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