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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뜽삼이 Jun 12. 2023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아이패드 연결하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으니 OO님이 먼저 이야기 좀 나누고 계실래요?"

그렇게 팀장님은 자리에서 쏙 빠진 채, 내가 회의를 주도하게 되었다.

내일 있을 임원 교육을 앞두고, 사전 점검을 위한 회의가 오후 5시에 시작되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만, '내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예측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직접 강의안의 내용을 하나 하나 설명하는 것은 급작스러운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심지어 회의에 참석한 고객사 PM의 시선은 내가 아닌, 팀장님이 한창 작업 중인 아이패드에 머물러 있었다.

'나와 함께 이야기 나눌 생각이 없는 것일까?'

그녀의 시선에 대한 나의 주관적인 해석이었다. 왠지 쭈뼛쭈뼛하게 된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막막하기도 하고, 또 이 상황을 앞두고 나는 잔뜩 겁을 먹은 듯하였다.

"내일 교육을 앞두고, 어떤 얘기를 나누면 좋을까요?"

드디어 내가 입을 열었다. 어렵사리.

고객사 PM은 내일 교육에 사용할 강사님의 강의안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주요 포인트를 설명해줄 것을 내게 요청하였다. 

식은 땀이 나기 시작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왜냐 하면, 나는 강의안에 담긴 내용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PPT에 포함된 단어의 의미를 내가 헷갈려하는 상황이 펼쳐졌는데, 나의 얼굴은 기다렸다는 뜻이 벌겋게 달아올라 꽤나 화끈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부터였다. 나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 것은. 

5분 일기를 쓰는-벌써 10분이 다 되어간다-지금까지도 편두통이 느껴진다.

이런 몸의 증상도 결국은 내면의 느낌을 억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누군가의 주장과 맞아떨어진다.

조금 전 아내와 밖에 나가 산책하며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덜컥 '설명'을 맡게 된 상황에 대한 당혹감,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 못하고 최대한 그럴 듯하게 설명해야만 했던 압박감 등에 관해서도.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이 결국 지금과 같은 업무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점 또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강의는 강사가 따로 하고, 교육 기획의 작은 일부만을 맡고 있던 상황에서,

갑자기 나는 그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즉, 삼성전자 주식 겨우 몇 주 가지고 있는 소액 주주가 삼성전자의 사업 방향성을 설명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랄까.

아무튼 나의 개인적인 느낌에 관한 경험이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느낌을 유발하는 이 시스템에 관해서도 고민해볼 수 있어 꽤나 흥미로웠다.

p.s. 참고로 나는,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고객에게 설명을 하였고 회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것을 '솔직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고객의 변화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컨설턴트는 무턱대고 모른다고 대답해선 안 된다. 기본적으로 고객을 만족시킬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가능한 선에서는.  


-23.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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