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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뜽삼이 Jul 19. 2023

제가 해볼게요, 팀장님

23.07.18.화요일


오늘도  역시 오전 8시 반부터 고객사 팀장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 교육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이틀 연속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다가 그렇게 아침이 되어 침대에서 일어났다. 컨디션이 꽤 나쁜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게  회사에 도착해서 오늘 있을 교육을 준비하는데, 이상하게 강사님이 온라인 Teams 모임방에 등장하질 않는다. 뭔가 쎄한 느낌을  받은 나는 10분 동안 5통의 통화를 하였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전 08시 19분

강사님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쎼한 느낌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 교육이 있는 것을 까먹으셨단다. 일단 이 사람과 전화기를  붙잡고 있어봐야 답이 안 나올 것 같으니, 우리와 함께 일하고 있는 다른 강사님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오전 08시 21분

또다른  강사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분은 오늘 오후에도 다른 오프라인 교육 일정이 있어서 곧 나가봐야 한다고 그런다. 내가 제발...  한번만 도와달라고 거의 울듯이 애원하였고 그렇게 5분간 통화하였으나 소득 없이 전화를 끊어야만 했다. 이 강사님의 마지막 대사는  "끊어요"였다.


오전 08시 26분

팀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강사님이 교육 일정을 까먹으셨대요. 또 다른 강사님도 일정이 안되신대요. 어쩌죠? 팀장님은 우선 고객사 담당자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교육 진행이 어려울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신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이대로 교육 진행은 절대 무리다.


오전 08시 27분

고객사  교육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죄송하지만 현재 교육이 어려울 것 같다고. 교육담당자는 나보고 교육을 하란다. 교육 시작 1분  전에 펑크를 내고, 팀장님들 교육 일정을 다시 조율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며... 처음에는 나에게 마치 의견을 구하듯이  질문 형태로 말을 걸어오지만, 내가 그럼에도 '강사님이 준비한 내용인데, 제가 원활하게 진행하는 데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하자 이번엔 수위를 높여 강요하는 형태로 대답을 해온다. 그 때 직감했다. 물러설 곳이 없다는 사실을...


오전 08시 29분 교육 시작 1분 전

팀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교육 담당자의 입장을 전했고, 팀장님께서는 내가 교육을 진행할 수 있겠냐고 물으신다. 팀장님한테도 도와달라고  이야기했는데, 팀장님은 아직 출근 전... 그 와중에 Teams 교육방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있는 것이 보인다. 시계는  어느덧 08시 30분을 가리킨다.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 때 내 입에서 나온 한 마디.


"제가 해볼게요, 팀장님"


그렇게  해서 오늘 처음으로 3시간 반 동안 고객사 팀장님들을 대상으로 Microsoft365 활용에 관한 강의를 진행했다. 조금 전  아내와 함께 오늘 통화한 녹음파일을 차례로 듣다가, 마지막 오전 08시 30분이 되어서야 내가 팀장님에게 건넨 말 한마디를 듣고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감동의 눈물이었다. 벅차오름의 눈물이었다. 앞선 여러 통의 통화에서  나는 철저히 약자였다. 그저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모든 책임을 떠안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땐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엄청난 압박감이 나를 지배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러던  중, 팀장님과의 통화에서 나온 저 말은 내가 상황을 새롭게 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역으로 이용하는,  마치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의 멜로디가 들려오는 듯한 그런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것이었다. 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너무 놀랍고 기특하고 감격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버린 것이다... 사실 저 녹음파일을 듣기 전까지 내가 저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여러 차례 강의 내용을 들어봤다고는 하나,  내가 직접 '전달'한 적은 없었고 또 최소한의 준비 시간마저 확보하지 못한 채 그냥  말 그대로 '얼떨결에' 강사가 되어있었다. 가장 초반부에 진행하는 내용은 기존에도 내가 맡았던 부분이라 원활하게 흘러갔지만...  그 이후 본격적으로 Microsoft365의 기능들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머릿속이 아주 새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내  안에는 '이걸 잘 해결해내고 싶다'는 의지가 넘쳐났고, 또 나름의 자신감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장장 3시간 반  이라는 시간을 내가 소화해냈고, 팀장님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동료들도 내가 이걸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다는/ 해냈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워했다. 실제로 교육만족도 결과를 확인했을 때에도 기존에 강사님이 진행했을 때와 비교했을 때 오히려 높은 수준이었다.  팀장님은 앞으로 굳이 강사를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런 '사고'가 오히려 새로운 기회를 열어준 셈이다.


특히 '동기부여가 확실히 되었다'는 학습자 의견을 받았을 땐 다른 어떤 의견들보다도 만족스러웠다. 이번에도 나는 얼떨결에 문제를 해결해냈다. 우연히, 우발적으로...


집에  돌아와 아내와 산책을 하며 참으로 다양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평상시 관심있는 것들을 좇아 학습해두었기에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이  빛을 발할 수 있었다는 얘기, 스티브 잡스의 커넥팅 닷츠...내가 강의하며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들.


그리고  오늘은 내가 '준비해서, 잘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강의에 몰입할 수록 점점 여유를 느끼게 되었는데, 실제로  학습자들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고, 실수하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 또한, 나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강의의 소중한 일부라고 받아들였고, 나름대로 즐겁게 강의를 진행했던 것 같다. 이 또한 '학습'에 관해 무언가를  말해주는 것 같다. 잘해야지, 노력해야지, 하는 것들은 사실 그다지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내 방식대로 즐겁게  몰입하며 하는 일에서 성과를 얻을 확률도 높은 것 같다. 나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진짜 내 방식대로 한번 강의를 진행해보자 !  하는 생각이 있었다.


저녁에는 집에 와서 잠깐 쉬다가 맘스터치 햄버거를 먹고, 바로 이어서 피아노연습실에 찾았다. 마음이 후련하고 홀가분해진 나머지 나름의 여가생활을 즐긴 것이다. 


아내와 주고받은 이야기들을 모조리 이 글에 적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훨씬 풍성하고 깊은 이야기가 오간 것 같다.


오늘  정말 뜻깊은 날이었다. 만약에 저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감히 저런 일을 시도해볼 수 있었을까? 기회가 주어졌을까?  혹은 내가 그걸 기꺼이 원했을까? 글쎄다. 위기를 기회로... 유연함의 힘...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내 나름의 좋은 전략인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팀장님한테 했던 말 "제가 해볼게요, 팀장님" 이게 제일 감격스럽다. 그 숨막히는 압박  속에서도... 


p.s.  설치류씨마저도 나의 오늘 업적을 칭송하는 데 이르렀다. ex."강사님보다 훨씬 잘하시는데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설치류씨는  일반적으로 팀장님의 입장을 따라가는 것 같다. 속에서는 어떤 감정을 품고있는지 여전히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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