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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복지사 박동현 Aug 17. 2020

6·25, 광화문 집회, 그리고 니체

도덕의 계보학을 통한 사회 비평

6·25, 광화문 집회, 그리고 니체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0년이 지났다. 검붉은 피를 튀기며 찢고 죽이는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흰머리가 무성한 노인이 되어버렸다. 이제, 어린 10대 20대들에게 전쟁이란 역사책에서만 볼 수 있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 흉터처럼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있다.


냉전 체제가 막을 내린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빨갱이’라는 이름의 ‘머리에 뿔이 나고, 어린이들을 잡아가며, 입에서 불을 내뿜는 악한 괴물’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 만 같다. 뿐만 아니라 그런 빨갱이를 죽이는 것이 ‘선’이며 삶의 ‘이유’로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여전히 건재하다. 아직도 피 튀기는 전쟁은 계속되는 것이다.      


며칠 전 8.15, 광화문에 모인 수많은 인파가 있었다. 현 정권의 부동산 정책, 조세정책 등 좌파정권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상황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태극기를 들고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광화문으로 나와 시위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선한 사람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하는 선한 사람들이 코로나 19 우려로 집회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마스크를 내리고 소리를 지르고,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고 심지어 몇몇 단체에서는 시위에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도 제대로 주고 있지 않으니 정말 ‘선한 사람들’이 맞는지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죄 없는 일반 사람들을 아프게 할 수 도, 심지어는 죽게 할 수도 있는 행진을 당당하게 걸어가게 하는, 이 당당한 분노와 혐오의 선한 눈빛들은 무엇에 그 기반을 두고 있을까?     

 

니체는 말한다. ‘원한’을 기반으로 한 ‘악함’과 ‘좋음’이라는 개념에 대비되는 ‘나쁨’은 다른 것임을. 


'원한'을 품은 인간이 생각하는 '적'을 상상해 보자. 바로 여기에 그의 행위와 그의 창조가 있다. 그런 인간은 '악한 적', 즉  '악한 사람'을 마음에 품고, 더구나 그것을 기본 개념으로 하여, 거기에서 그것의 잔상이나 대응 인물로 '선한 인간'을 생각해 낸다. - 바로 자기 자신을!...... 
-도덕의 계보학 53p-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악한 적에 대응하는 인물로 자신을 선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의 결과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닐까?


조금 더 니체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자. 니체는 그가 살았던 유럽의 시대를 ‘기독교적 윤리’에서 나온 노예-약자의 도덕이 병적으로 물든 시대라고 진단했다. 인간으로서 겪어야 할 필연적인 ‘고통’을 직면하고 스스로 이겨낼 힘이 없는 약자들은 그 고통을 외부의 도덕을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이 외부에서 주어진 도덕에 의하면 고통은 바로 자신의 ‘죄’때문이라는 판결을 내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죄’에 대한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이 이들을 움직이는 동기가 된다.      


그런데 이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은 무슨 문제가 있을까? 개개인이 ‘주인의 도덕’, 즉 ‘강자의 도덕’이 아니라 ‘약자’, 즉 노예의 도덕이 만들어내는 행위는 비겁하다. 강자는 ‘고통’을 ‘고통’ 그대로 보고 스스로 소화해 내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고통을 줄이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한다. 그중 한 가지가 바로 ‘폭력’의 형태로 나타난다. ‘선한 자신’에 반하는 ‘악한 너’를 만들어 나 자신이 가진 고통을 잠시나마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고통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러나 제대로 직시하자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모두 고통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오롯이 ‘문재인’때문이거나, 오롯이 ‘빨갱이 야당’때문은 아니다. 사실 그 고통은 ‘어제 먹은 컵라면’이나 ‘말 안 듣는 처자식’ 때문일 수도 있다.      


절대적으로 착한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광화문에 나간 사람들이나 집에 앉아서 편하게 연휴를 즐기는 사람이나, 나나 너나, 어느 누구를 ‘선’하다고 또는 ‘악’하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지났다. 언제까지 원한에 사로잡혀있을 것인가. 전쟁의 한 복판에서 조금만 거리를 띄워 생각해보자. 남 탓만 하는 태도로는 결코 어떤 성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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