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사회복지 어떻게 공부했어요?
‘나는 요즘 집이라는 개념보다 '타운 센터'개념으로 내가 살 곳을 상상한다. 거대 백화점과 우뚝 솟은 관 주도적 문화 공간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만든 학교와 문학 카페와 식당과 소극장과 반찬 가게와 작은 진료소들이 있는 타운 센터 말이다. 노인들이 골목길 이곳저곳에 모여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보고 있고, 수시로 물물 교환이 이루어지고, 서로가 잘 알기에 함께 있음으로 안전한 마을, 사람들이 자주 이사를 가지 않고 가게도 자주 망하지 않아 단골이 되는 그런 마을이 후기 근대적 주거의 핵심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 지금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돌봄과 학습이 있는 주거'를 상상할 때다.'
『다시, 마을이다』 144p 발췌
누군가는 이러한 마을을 꿈꾸는 상상을 농경사회에서나 가능한 철없는 소리, 혹은 시골에서나 가능한 꿈같은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꿈이 비단 허황된 몽상가의 생각이 아니라 근대 후기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한다.
19세기 공업 도시화의 과정에서는 '집', 즉 '가정'이 바깥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이자 안식처의 역할을 감당했다. 보통의 경우, 집이란 생계 부양자인 남편이 있고 그를 기다리는 사랑스러운 아내가 집에서 육아와 집안일을 하고 노후를 책임져줄 자녀들을 기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성장할 것 같았던 경제는 어느새 주춤해졌다. 저성장 시대, 다시 말해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가정을 지탱할 수 없고 자녀들은 부모보다 더 나은 경제적 상황을 꿈꿀 수 없는, 그래서 모두가 일하고자 하지만 모두가 한 치 앞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불안한 시대가 온 것이다. 가족은 더 이상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한다.
그리고 이어서 저자는 이 과정을 이미 거쳐간 나라들, 영국이나 일본을 보면 독특한 공통점들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머뭇거림', '욕심 없음' 그리고 '검소함'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그들 나라들의 독특성이라기보다는 근대화 후기의 특성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은 새롭게 삶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때 그들은 다시 고향을 그리고 자신의 역사와 대면한다. 쓰던 것, 손때 묻은 것을 사랑하게 되고, 재활용할 생각을 하게 되며,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농촌적이고 봉건적인 것이 촌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도시적인 것, 새것, 반짝거리는 것, 시간성을 죽인 것이 참을 수 없이 촌스럽게 보인다. 이것이 바로 '후기 근대' 또는 '탈근대'의 시작이다.’ 『다시, 마을이다』 130p 발췌
이러한 정신이 후기 근대 사회, 다시 말해 탈근대를 이루어갈 철학이 될 것이라고 본다. 근대에는 가족만 있으면 살 수 있었지만 후기 근대에는 마을이 없이는 삶을 지탱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도시와 세련된 것들이 품고 있는 한계를 느끼고 책 이름처럼 다시, 마을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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