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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바인 Dec 03. 2016

사랑해주세요 고객님

 얼마 전부터 하루 건너 끈덕지게 전화를 걸어오는 번호가 있었다. 발신자를 자동으로 알려주는 애플리케이션 덕분에 나도 그 전화를 끈덕지게 무시했다. 발신지는 나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부산. 전화를 건 쪽은 한 카드사의 보험 영업팀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올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들의 위선적인 고백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날도 그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문득 나는 궁금해졌다. 그들은 왜 나에게 이토록 전화를 거는 걸까. 왜 포기하지 않는 걸까. 내가 그들에게 그토록 가치 있는 고(호)객이었던가. 꼭 다툼 후에 화를 풀어 주려 걸려온 연인의 전화 같기도 했다. 이번엔 통화 버튼을 눌러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나를 향한 그들의 짝사랑도 끝을 볼 거 같았다.

 

 전화를 건 이는  남자 텔레마케터였다. 그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 대신 간간히 웃음을 섞어가며 친절한 말투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해당 카드사와 연계된 건강 보험 상품을 소개하며, 그에 대한 장점을 일일이 숨도 쉬지 않고 읊었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무신경한 투로 ‘네, 아니요’를 반복하며, 그의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리기로 했다. 이미 다른 건강 보험 상품을 이용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자, 그는 중복 적용이 가능하다며 능숙하게 방어선을 쳤다. 내 말은 ‘또 다른 보험이 필요없’다는 뜻이었지만,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그런데 내가 무미건조한 투로 일관하자, 그는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지금까지 드린 말씀이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시겠죠? 그러실 거 같아요.”

 그러고 나서 그는 잠시 웃음처럼 숨을 골랐는데, 순간 그것이 나에게 꽤 자조적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그가 퍽 측은해 보였다. 그가 카드사의 텔레마케터가 아닌 그저 내 또래의 남자처럼 여겨졌다. 헤드셋을 쓰고 모니터를 바라보던 젊은 청년은 숨을 고르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는 회사의 명령에 따라 하루 종일 생면부지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이다. 상대가 전화를 받는 순간 교육받은 내용들을 토해내고, 상대의 결정에 따라 방문 상담원을 보내기 위해 주소와 시간을 확인할 것이다. 실적에 따라 평가받을 것이고 그에 따라 급여도 결정될지 모른다.

 그는 내 담당 직원이라고 했지만, 그가 하루 동안 걸어야 할 전화는 수십수백 통에 이를 것이다. 그는 몇 사람의 목소리를 거쳐 나에게 왔을까. 나처럼 그의 말을 다 들어준 사람도 있을 거고, 귀찮다는 투로 거칠게 전화를 끊거나, 아니면 단지 신호음 뒤에 숨어 목소리를 감춘 이들도 있을 것이다. 불쑥 욕설부터 내뱉는 진상들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회사가 아닌 그들일 거고.


 나는 항상 상품을 팔기 위해 전화를 걸어오는 이들을 ‘기업’에 소속된 ‘직원’이라고만 생각해왔다. 고객에게 공짜로 혜택을 주겠다는 그들의 저의를 종종 의심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 그의 전화를 받고 나서, 그들도 결국 나처럼 아등바등 살아가려는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은 기업의 뜻이지만, 전화 속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그는 웃음처럼 숨을 골랐지만, 속으로는 울음을 삼켰을지 모른다. 단지 나만의 상상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상담원을 보내주겠다는 그의 제안에 고맙지만 아직 결정하기 힘들다고 대답했다. 그는 ‘다시 전화를 드리겠다’고 했지만, 그 뒤로 아직 전화가 온 일은 없다. 그를 비롯한 많은 텔레마케터들이 여전히 모르는 이들에게 전화를 걸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모쪼록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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