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교시가 끝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도시락을 까먹었다. 뺑뺑이 세대였던 우리들이 선배들과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이 도시락이 결정타가 됐다. 명문여고 선생님들에게 수업 중 맡게 되는 도시락 냄새가 어떠했을지는 교실 문을 들어서는 선생님들의 얼굴 표정에서 가끔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선배들과 우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선배들과는 다른, 그래서 살짝 기죽어 있었을지도 모르는 내가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학교에 대한 소속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학교 강당에서 ‘이상 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학교 선배였던 문인이 1회 수상작가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나이 마흔에 등단하여 어눌한 말씨로 수상소감을 하던 고 박완서 작가를 그때 처음 보았다. 박 작가는 너무 평범해서 수상작가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리 집이나 친구 집에 가면 반겨주는 평범한 엄마들 모습이었다. 나이 마흔은 지금은 청년 축에도 들지만 당시 고등학생에겐 쉽게 가 닿을 수 없는 나이이기도 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박 작가에게 선배로서의 친밀감을 연결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도 그 시상식이 인연이 됐는지 나는 매년 이상 문학상 수상집을 샀다. 한 해 두 해 사다 보니 수상작가와 작품에 대한 관심도 연례행사가 되었다.
지금도 책꽂이 맨 위 칸을 차지하고 있는 수상집들은 올해 44회 수상집까지 꽤나 오랜 세월을 나와 함께 했다. 문학상에 대한 관심과 모교에 대한 긍지도 잊지 않게 해 주었다. 수상집은 단편소설 모음집이라서 옮겨가며 볼 작품들이 많아서 좋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실험적인 문학 유형들도 등장하고 사회변화에 맞는 주제의식들이 시의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상 문학상 이후 여러 개의 문학상들도 생겨났다. 독서에 큰 관심이 없는 중에도 1년에 여타의 문학상 수상집들을 서너 권 읽는 것으로 독서의 기본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상 문학상 시상식 덕분이었을 것이다.
박완서 작가는 등단 이후 놀라운 필력으로 작품들을 이어갔다. 가톨릭에 귀의하여 교회 주보에 묵상 글을 연재할 때는 박 작가와 신앙인으로서의 연대감도 느꼈다. 글쓰기는 남의 일이라 생각했던 내가 나이 육십이 다 되어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처음으로 문학과 작가라는 것을 경험하게 해 준 그 시간으로 돌아가 보게 된다. 하얀 깃에 교복의 허리 벨트를 단정하게 고정한 키 작은 17살 소녀에게 글쓰기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어쩌면 43년 전 그 시상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박 작가는 나이 일흔이 넘어 발간한 산문집 '호미’에서 “나이에 6자가 들어 있을 때만 해도 촌철살인의 언어를 꿈꾸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어질고 따뜻하고 위안이 되는 글을 소망하게 된다.”는 말로 글 쓰는 이들의 존재 이유를 풀어놓았다. 대 작가가 소망했던 어질고 따뜻한 글쓰기를 나도 소망한다. 배지영 작가는 “글 쓰는 사람에게는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다.”라고 했다. 그 말대로라면 적어도 나는 박완서 작가에게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더 많은 작가들에게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보기로 한다.
얼마 전부터 독립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에세이팀 동료들과 서로 응원하는 소박한 출판이지만 나에게는 첫 책을 내는 기념비적 사건이다. 이제는 내 글을 읽어 줄 아름다운 사람을 기다리게 되었다.
43년 전, 도시락을 까먹던 17살 소녀는 이제 틈틈이 글을 읽고 쓴다. 글을 읽으며 누군가의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 이것이 글쓰기의 시작이라면 글쓰기는 너무나 근사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