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레터
<파랑새>는 벨기에의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1862~1949)가 1908년에 지은 희곡입니다. 틸틸과 미틸 남매가 크리스마스 전야에 파랑새를 찾아 헤매는 꿈을 꿉니다. 깨어나 보니 자기들이 기르던 비둘기가 바로 그 파랑새였음을 깨닫는다는 내용입니다.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는 주제를 담고 있으며, 심리학에서는 헛된 희망에 사로잡힌 증세를 '파랑새 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20년 이상 깨달음을 찾아 방황했습니다. 지금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나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늘 '나와 깨달음을 분리'해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와 깨달음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깨닫기 위해서는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명상이든 수행이든.
물 속에 있는 물고기는 자신이 물 속에 있음을 어떻게 알까요? 물 밖으로 나오면 물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그속에 있을 때는 알지 못합니다.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면 깨끗한 공기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화생방 훈련' 한번이면 우리가 공기와 함께 숨쉬고 살아가고 있음을 즉시 깨닫습니다. 공기와 함께 하고 있지만 공기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존재도 비슷합니다. 늘 존재하지만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이해하기 힘든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과학적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쉽게 수용할 수 있습니다.
에너지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은 둘이 아닙니다. 영화 <아바타>에서는 생명의 나무를 중심으로 모든 생명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명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모든 물질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김승호 회장은 <돈의 속성>에서 '돈은 인격체'라고 표현했습니다. 에너지 차원에서는 적확한 표현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물질은 '자연의 재료'와 '인간의 노력'으로 만든 자연의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 자연 그리고 물질은 하나로 연결됩니다.
여기까지 개념이 이해가 된다면 하느님으로의 연결이 어렵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했습니다. 만물, 자연, 인간, 물질 그리고 하느님이 결코 둘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개념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내가 이해 가능한 영역'은 인간의 세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은 하느님의 세계라고 여기면 어떨까요? 인간은 자연 속에 살고 있지만, 대자연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 곳곳에 미스터리는 수없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왜 제가 깨달음을 찾아 방황했다는 표현을 사용했는지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자연, 인간, 물질 그리고 하느님이 하나로 연결됨을 수용할 수 있다면 가장 큰 깨달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항상 괴롭히는 '생각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현재 어떤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나요? 대부분 '돈'에서 비롯됩니다. '돈이 많고 적음'이 정말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일까요? 돈이 많으면 행복하고, 돈이 적으면 불행한가요? 돈 자체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지 못합니다. 돈은 그냥 돈일 뿐입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돈'이 아니라 '돈에 대한 의미부여'입니다.
일찍이 부처는 '자족하는 자가 가장 행복하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돈이 많아서 행복한 것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것도 아님을 설파했습니다. 건강은 어떨까요? 건강하면 행복하고, 건강하지 못하면 불행할까요? 돈과 마찬가지로 '건강' 자체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건강에 대한 의미부여'입니다.
외모는 어떨까요? 예쁜 사람은 늘 행복하고, 못생긴 사람은 늘 불행할까요? 돈 그리고 건강과 마찬가지로 '외모' 자체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외모'가 아니라 '외모에 대한 의미부여'입니다.
이런 내용을 알고 있지만 돈, 건강, 외모 등 수많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생각' 때문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만드는 그 생각 때문에 늘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나와 너를 구분짓지 않고 하나로 여긴다면 어떨까요? 너와 내가 하나라면 비교로부터 발생하는 고통이 사라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나와 너 그리고 하느님이 하나라면 어떨까요? 더 편안하고 평화로워집니다.
깨달음의 실체는 딱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인간은 늘 하느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물 속의 물고기처럼, 공기 속에서 숨쉬며 사는 인간처럼 하느님은 늘 곁에 있음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너와 나 비교 없이 모두가 하나로 연결됨을 인식하게 됩니다.
두 번째, 나와 하느님이 분리되는 순간 생각이 일어난다는 깨달음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내가 만든 생각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는 '내가 의미부여한 생각' 때문입니다. 돈이 많든 적든 그냥 받아들인다면,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든 그냥 받아들인다면, 잘 생겼든 못 생겼든 그냥 받아들인다면 계속해서 생각의 고통 속에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이 고통은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고통, 아픔, 슬픔, 좌절, 괴로움도 결국 우리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편안하고 평화로워지는 유일한 방법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모두 수용하는 것입니다. 즉, 괴로울 때마다 '이또한 지나간다. 별의미 없다. 더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다. 늘 하느님과 함께 한다.'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잠시 고통을 느낍니다. 장터에 온듯 옆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아주머니 무리가 있습니다. '쇼미더 머니' 출연자가 속사포 랩을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못난 남편, 서운한 아이들, 돈 문제, 얄미운 시댁, 괴로운 코로나, 그리고 나와 무관한 비운의 드라마 주인공 등 끊임없이 이야기 합니다. '이또한 지나간다. 별의미 없다. 더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다. 늘 하느님과 함께 한다.'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