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받았어. 그 사람은 나빠'가 아니라 그 사람으로 인해서 잃어버린 우리의 욕구들이 있잖아요. 상실된 우리 아픔이 있잖아요.
거기까지 가서 그 아픔에 집중해보자는 거예요.
-리플러스 인간연구소 박재연-
그 아픔이 무엇일까.
'존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상대가 알고 사과해주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니 그 욕구를 스스로 충족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을 살면서 탐색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건강한 대화는 내 욕구에 기반한 대화여야 해요'
이 말에 따라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저희 가족도 시간이 필요해요, 열명이 아닌 네 명 가족의 시간이요"
"네 명이 가족이 아니라 열명이 가족이지"라고 말씀하실게 뻔해서 사실 입 다물고 살았던 시간이 지난 10년이다.
깊게 박힌 어른의 신념이 쉽게 바뀌진 않을 거 같아서 그랬다.
'미사여구를 붙여 착하게 또는 예쁘게 말하는 게 아니라 내 욕구에 기반해 솔직하게 말을 하라'는 말이 참 와닿고 있었다.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시부모님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솔직했어야 했구나...'
10명이 가족이라는 전제에 각자의 삶과 각자의 라이프 스타일이 무시되는 부모님의 지나친 관심은 간섭이 되었고, 지나친 결속은 개인이 무시되는 정서적 폭력이 되었다.
내 욕구에 기반한 대화를 하지 못해서 참고 넘어가고를 반복하 더 보니 결국 하나씩 터지기 시작했다.
동서 그리고 나.
이제와 남은 건 어색한 관계뿐.
아들과 시부모님은 다를지언정 며느리는 엄연히 남이기에 관계 회복이 쉽지 않았다.
어버이날을 맞아 열 명 가족이 모였다.
나는 사건이 있고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어색하고 눈 마주치는 게 불편한 시아버님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두 달 사이 시아버님이 코로나에 걸렸다는 소식에 미운 감정보다 걱정되는 마음이 보태져 안부전화를 드렸었고, 시어머님 생신과 시아버님 생신으로 친인척이 낀 채 두어 번 만남을 가졌었기에 감정의 온도차가 극과 극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전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큰며느라, 시아버지 미워 죽겠지?"
순간 얼음.
시아버님이 먼저 사건을 언급하시려는 듯 입을 떼셨다.
아무 말도 않고 불판에 익어가는 고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있던 남편이 좌식 테이블 밑에 긴장 놓고 퍼져 있던 내 다리를 뚝 친다.
'무슨 말을 해도 감정 컨트롤 잘하고 동요하지 말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시어머님도 우리 남편처럼 시아버지에게 눈치를 주셨던 건지"왜, 있어봐라! 이런 건 풀고 넘어가야지"라며 말씀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날은 그래, 전화 좀 자주 하라는 말을 하려고 한 건데 뭐가 친정 얘기가 나오고, 나도 그렇게 독재적인 사람이 아닌데... 그날 그 자리에서 마무리를 하고 나왔어야 하는데 숟가락을 던지고 나와서 마음이 그랬다... 어찌 됐든 미안하다"
잠시 조용한 침묵이 자리 잡아,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제가 죄송합니다" 답변을 드렸고 아버님은 "아니다" 그렇게... 길어질 것만 같았던 대화는 짧게, 여운을 남긴 채 마무리되었다.
'친정. 독재'
그 사건을 통해 두 개의 키워드가 남았다면 나름 성공적이라 생각했다.
감정에 북 바쳐 "얼마나 더 잘하라고요?!" 대들듯 말한 미성숙했던 내 태도가 솔직히 그간 마음에 쓰여오기도 했고 사실 요점이 뭐였지 할정도로 나 또한 감정이 격해 있었기에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까지만 생각하기로 했었다.
두 달 여동 안 시어머니께 종종 안부 연락은 드렸고 남편은 시어머님만 모시고 쇼핑을 다녀오기도 했다. 내가 보는 남편도 참 많이 변했다. 시아버님께 혹한 말듣고 돌아와 눈팅팅 붓도록 우는 와이프 모습에 충격이라도 받았던건지 본인도 많이 변해야겠다고 생각이 든건지 어쨌든 아들도 변했다.
시어머님과 남편이 쇼핑하던 날, 전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시어머님의 목소리는 내가 여태 들어본 것 중에 가장 하이톤의 기분이 날아갈 듯한 목소리였다.
남편은 내가 하던 역할을 덜어주어 편해지는 중이었고 시어머님은 나에게 고맙다고 말씀하시니 어안이 벙벙해지는 중이었다. 사실 아직도 그 고마움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오래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가족이라면, 자주 봐야만 하는 가족문화라면 더욱 개인을 존중해줘야 한다.
가족에 대한 가치관이 다른 고작 두명의 부부도 그러한데 열 가족이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집안의 어른이 있다면 더욱 단합 될 확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때그때 각자가 모두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