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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공리셋 Aug 09. 2020

결혼 10년 차 며느리 생존기

일기를 씁니다

2010년 6월 12일 결혼식을 올린 후 신혼여행을 다녀와 시어머니께 드렸던 첫 안부전화.


"어머니~"

"어"

"뭐하세요, 식사는 하셨어요?"

"오랜만이다?!"

말투가 결혼 전에 알던 그... 분이 아니신 것 같다.

"너는 결혼하기 전이랑 같은 줄 아니?! 일주일 만에 전화를 하게! 내보다 너희 시아버지가 더 화났다"

.

.

.

완전 쫄보 새댁이었던 나는 결혼 전 시어머니의 모습과 너무도 다른 말투에도 당황했지만 예상치 못한 공격에 손이 떨리고 있었으나, 또 한 번 더 시아버지께 용기 내서 전화를 했어야만 했다.

시어머니보다 더 화가 나셨다고 하니...


"아버님~"

"어, 그래..."

"아버님 화나셨다고요... 죄송해요..."

"왜? 왜? 뭐가?...."

진짜 몰라서 묻는 눈치셨다...

"아니 제가 안부전화를 안 드려서 화나셨다고..."

"아이고~그런 걸로 화를 내나... 별일이다! 주말인데 뭐하니?! 저녁에 밥이나 한 끼 하자!"

.

.

.

무서운 시어머니의 센 말투에 비해 시아버님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못해 부드럽기까지...

분명 두 분 중에 한 분이 거짓말을 하고 계신 거구나 생각했다.


결혼 10년 차에 확실한 답을 알았다!

"너희 시아버지가...."

시어머니께서 며느리가 맘에 들지 않아서 지적을 하고 싶으시거나 어머님의 화나는 포인트를 며느리에게 전달하고 싶으실 때! 딱 포함되는 시어머니만의 레퍼토리라는 것을...


그렇게 크고 센 목소리는 처음 들어봐서...


"나는 딸이 너무 갖고 싶어서 입양할 생각까지 했었는데, 너희 시어머니가 몸이 이유 없이 자주 아프고 해서 포기한 것도 있었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머스마만 둘만 있게 됐는데... 요즘 세상에 딸, 며느리가 어딨노... 딸 하자~"

소주 한잔 걸치시고 수줍은 듯 전달해주시는 아버님의 말속에 진심이 느껴져, 나는 정말 딸이 되어 드리고자 생각했다. 결혼 전부터 아버님의 소소하게 묻어나는 정감 가는 말이나 행동에 늘 감사한 마음이었던 듯하다.

"네... 아버님..."


하지만...

그 감동과 온기가 채 느껴지기도 전에 바로 옆에 계시던 시어머니가 거드신다.

"딸은 딸이고! 며느리는 며느리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고?!"당황스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그렇게 속의 말이 밖으로 쉽게 나오는 건 처음 봐서...


남편보다 두 살 어린 도련님이 장가를 가겠다고 했다.

'나에게도 동서가 생기는구나!'

며느리가 혼자가 아니라서도 좋았다.

솔직히 말하면 며느리라서 해야만 했던 의무감과 책임감을 조금은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생겨서도 좋았다.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 후 처음 시댁에 인사 오던 날, 퇴근 후 시댁으로 갔더니 시어머니와 시이모님이 계셨다.

평소와 다름없이 인사를 하고 들어갔는데 뭔가 분위기가 안 좋았다.

시어머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순간 내가 온 줄 모르시나 착각하고 "어머니 뭐(음식) 많이 하셨네요..."

그런데 정말 못 들으신 건지 거실에 가서 누우셨다.

나는 또 쫄보가 되어 뭘 잘못했을까... 생각했다.

'하루 연차를 내고 와서 음식을 도왔어야 했구나'를...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도 스스로 깨달았다. 주변에 물어보고 나서.

회사 다니면서 휴가 내는 게 쉬운 건 아니지만 시간 내서 와서 음식을 도와달라고 미리 말씀하셨으면 했던 건 내 생각이었고 알아서 노력했어야 했던 거였다. 요리 베테랑이신 시이모님이 오신다 하니 '혼자가 아니셔서 다행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빈말 못하는 며느리는 일 마치자마자 최선을 다해 뛰어 들어갔을 뿐 그렇게 투명인간 취급당할 줄은 몰랐다.

참으로 멍텅구리였다.

이제 장가보낼 도련님이 없어서 더이상 조심할 일 없겠네...쯧...


그렇게 가시방석이었던 적은 처음 겪어봐서...


첫아이가 태어나고 육아휴직 1년 후 복직 시점, 감사하게도 친정어머니께서 봐주시겠다고 하셨다.

두 돌 때쯤 되었을 때 친정어머니 허리가 고장이 나서 주말부부로 지내시던 친정어머니께서 아버지 곁으로 가실수 밖에 없는 상황이 와서 6개월만 누가 첫째를 보육해주면 되었다.

당시 6개월 후면 뱃속에 있던 둘째가 태어날 예정이라 육아휴직을 앞두고 있던 터였다.


5분 거리 같은 단지 내 살고 계시는 시어머니가 떠올랐다.

당연히 흔쾌히 허락을 해주실 줄 알았던 나의 생각과는 반대로 단방에 거절을 당하는 순간 눈물이 울컥 하고야 말았다

.

.

.

아버님은 당연히 봐줘야지라고 하셔서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꺼라는건 큰 오판이었다.

어머님이 보시는데 아버님 의견이 무슨 소용 있냐며 혼자 속상해 하지만... 해결책은 못찾겠고...제발 어머님이 그냥 허락해주시기만을 바라고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6개월이면 되는데, 왜 안된다고 하실까' 그냥 시어머니를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내 마음이 급박했으니...


결국 어머님도 아버님의 성화에 허락을 하시게 되었고,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시어머니와 나 둘만 남게 된 타이밍.

 "어머님, 우리 oo이 봐주신다고 허락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너희 엄마가 안 본다 해서 그렇지 머"

.

.

.

렇게 면전에서 뒤통수 맞는 기분은 처음 느껴봐서...


나는 다른 사람의 말에 상처도 잘 받고 외부 충격을 받으면 그 아픈 감정이 오래가는 사람인지라 언제부터인가 내가 다칠 것 같으면 피하거나 안 만나면 된다고 생각하며 지내왔다.

하지만 피할 수도 안 만날 수도 없는 가족인 시어머니.

반대로 온정이 많은 시아버지.

그래서도 자식들을 옆에 두고 가족은 자주 봐야만 정이 든다는 아버님의 생각에 따른 가족문화.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이 다칠 때면 나를 토닥이며 눈물을 흘릴 뿐, 어떤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먼저 결혼한 친구들을 만나

"원래 결혼생활이 이런 거야?"

"아니 너네 집이 특이한 거야, 어떻게 그렇게 자주 만나서 저녁을 함께 먹어?! 안 피곤 해??"

"......."

"피곤하다고 왜 말을 못 해? 너 바보야? 남편은 뭐래?"

"......."


내 남편의 성격은 나만 알고, 내 시어머니 시아버님의 특성은 나만 알고, 무엇보다 나라는 사람은 나만 안다.

거절 못하고, 거절하고 안 가면 나중에 두고두고 신경 쓰이고, 혼자 후회하고, 돌아서면 까먹고...

그냥 내 얘기 들어주는 친구들에게 위로받고 털어버리는 게 상책이었다.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생기면 상처 받은 내 마음은 스스로 이내야 할 나만의 과제일 뿐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에게 허용된 최후의 자유입니다.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마지막 권리죠.
글을 씀으로써 우리는 세상에 맞설 힘을 기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도 직시하게 되죠
- by 김영하 소설가-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렇다 할 형식도 없었다.

기분이 좋은 날은 좋은 기분을 더 만끽하고 싶어서 쓰고,

분노로 시작하던 일기는 빈종이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워 쓰다 보면 나중에는 그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면서 쓰인 글을 다시 읽으면 객관적인 시선으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어...

나는 곧 일기 쓰기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빈종이에 내 감정을 오롯이 쏟아부을 수 있었으니 더없이 편안한 무형의 대화 상대이기도 했다.


10년 전 결혼이 뭔지도 모르고 결혼해서, 그 모든 상황 자체를 거부하고 싶을 때도 많았으나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함께 쌓아 올려지는 게 가족이기에 지금까지 잘 살아왔고 지금도 잘 살고 있다.


사람은 부정적인 기억만 오래 남는다는 걸 몸소 깨달으며 좋은 기억도 함께 담아두기 위해 억지스럽게 일기를 펼치기도 하지만 잘 써 내려가지지는 않는다.  

감정의 롤러를 타면서 특별히 화가 날 때만 스피디하게 써 내려가는 걸 보면 분명! 일기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나다운 특별한 행위임이 틀림없다.


나는 남편을 사랑해서 남편과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은 둘이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말로만 들어서 체득하지 못하고 막살다가 결국 일기 쓰는 여자가 되었다.

시간과 일기와 함께 미운 정 고운 정이 함께 쌓이면서 시부모님의 원석을 보게 되었고, 그렇게 마음으로 이해하는 일이 많아졌다.

일기장을 펼치는 횟수도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저 지금 좀 아파요'를 외치며 일기장을 펼쳐 스피디하게 써 내려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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