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강력히 세우는 도구, 기록의 힘
나는 교회에서 청소년부 교사로 섬기고 있다. 지난 설명절 전 2박 3일 동안 교회에서 겨울캠프를 진행하였다.
이번 캠프에서는,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 전체를 읽기를 위주로 진행하기로 했다.
짧은 구절 몇 개를 나누는 방식이 아니라, 총 50장의 긴 본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흐름을 따라가는 시간으로 말이다. 솔직히 준비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요즘 아이들이 긴 본문을 따라올 수 있을까, 지루해하지는 않을까, 괜히 무리한 시도는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무엇보다 아이들보다 내가 조금 지쳐 있는 상태였고, 함께 하는 교사들도 바쁜 일정을 쪼개서 함께 하는 시간이라 이런저런 우려가 생겼다.
그리고 이런저런 고민 속에 준비를 하던 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우리의 힘과 의도로 끌고 가려하지 말고, 흐름에 맡겨보자.’ 기도하던 중 워크북을 잘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표를 중심으로 워크북이 같이 흐름을 잡아주게 하자! 전체 시간을 미리 시뮬레이션하고 그에 맞게 질문을 넣었고, 스스로의 생각을 기록하고 남길 빈칸과 공백을 남겼다.
아이들이 스스로 채워 넣을 공간을 알맞게 배치하고 이어가게 하는 것, 그게 이번 캠프의 중심이 되었다.
캠프 둘째 날 아침, 처음으로 캠프에 참여한 중1 아이들이 너무 힘들다면서 집에 가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떻게 분위기를 다시 잡을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그때 문득 형, 누나들 사이에서 더듬더듬 성경 읽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겠구나 싶은 마음에,
이 아이들만 따로 성경을 읽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들은 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중간중간 읽은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곁들였더니
더 흥미롭게 읽어나가기 시작하며 속도가 붙었다. 그리고 이해하고 깨달은 것을 워크북에 스스로 적게 했다. 오늘 가장 남는 장면은 무엇인지, 그 장면이 왜 마음에 걸리는지.
처음에는 어떻게 써야 할지 아리송해하더니, 조금 지나자 감을 잡았는지 표정이 달라졌다.
산만했던 분위기도 안정적으로 잡히고, 자신의 말과 글이 알맞은 것인지 묻는 과정에서 아주 잘하였노라, 잘하고 있노라 하는 나의 피드백에 안심하고 자신감을 얻어가는 모습이었다.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참가자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쓰는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분위기를 통제하려 하기보다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흐름을 잡고 중심을 세울 수 있게 도왔다.
마지막 날 비전 선언 시간이 있었다. 긴 성경 읽기 시간을 누구 하나 이탈하지 않고 어떻게든 함께했던 아이들이 또박또박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감정이 과열된 것도 아니고, 누가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기 언어로, 자기 믿음을 말하는 순간이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울림이 그 자리에 머물렀다.
준비과정에서 워크북으로 흐름을 잡자고 결심하고 워크북을 만드는 과정에 몇 날 며칠의 고심의 밤이 필요했는데....
그런 진한 과정이 담긴 워크북이, 실제로 멋지게 구동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성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니었다. 작년에 한 도서관에서 청소년 대상의 심리치유 글쓰기 과정을 워크북을 제작해서 진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자신의 맘을 꺼내고 글쓰기가 결코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줄까 엄청나게 고민하던 중 워크북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런 워크북을 만든 게 처음이라, 아이들의 반응이 어떨지 너무 궁금했는데 스무 명 넘는 아이들 중에 대부분이 워크북 내용에 충실히 기록하며
스스로 글을 써 내려가는 희열을 만끽해 가는 모습에 나도 같이 감동이 되었다. 또, 몇몇 아이들은 ‘도대체 이런 교재는 어떻게 만드신 걸까?’ 라며 감동 어린 의구심을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워크북에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채워갈수록 눈빛이 달라졌다. 처음 들어올 때는 흔들리던 눈매가, 문장이 쌓일수록 또렷해졌다.
마치 자기 안에 흩어져 있던 마음이 글 속에서 자리를 찾는 것처럼.
이번 청소년 겨울캠프를 마치고 교사 리마인드 설문을 작성하면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자연스럽게, 손길대로 움직인 시간들.’
준비 과정에서는 힘을 빼고 싶었고, 진행하면서는 순간순간의 지혜가 필요했고, 끝나고 나서는 오히려 내가 회복되었음을 느꼈다.
캠프 전에는 마음이 꽤 힘들었다. 그런데 떠밀리듯 시작한 시간이 나를 다시 세웠다. 창세기를 읽으며 아이들만이 아니라 내 이야기도 함께 지나갔다.
당장은 이해되지 않는 장면들이 훗날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 그 흐름이 먼저 나를 단단하게 했다.
나는 이제 확신한다. 기록은 단순한 메모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세우는 방식이다.
누군가의 해석 위에 서 있던 사람이 자기 문장 위에 서기 시작할 때, 그는 더 이상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가르친 것이 아니라, 쓰게 했을 뿐인데 아이들은 달라졌고 나도 달라졌다.
이번 캠프가 나에게 남긴 한 문장은 이것이다. 힘을 빼고 맡겨라. 네가 다 세우려 하지 않아도 각자의 문장이 각자의 삶을 세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설명하기보다 쓰게 할 것이다. 기록이 자아를 세우는 그 방식을, 나는 이미 여러 번 보았으니까.
[눅2:19, 새번역]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고이 간직하고, 마음속에 곰곰이 되새겼다.
[Lk 2:19, NIV] But Mary treasured up all these things and pondered them in her he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