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희일비를 넘어, 조망하는 삶으로
살다 보면
내 인생의 한가운데에
푹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내가 왜 이렇게 힘든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감정과 상황 속에서 계속 흔들리기만 하는 시간들.
눈앞의 일 하나에 크게 흔들리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오래 붙잡히고,
하루의 감정이
인생 전체를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좋은 일이 생기면
이제 다 괜찮아질 것 같고,
나쁜 일이 생기면
모든 게 끝난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우리는
너무 쉽게
일희일비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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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상황과 감정을
노트 위에 꺼내놓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그 감정 한가운데 허우적거리는
1인칭의 나로만 머물지 않게 된다.
쓰는 동안의 나는
그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그 상황을 ‘읽고 있는 사람’이 된다.
내가 내 삶의 관찰자이자,
독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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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생각보다 큰 변화다.
왜냐하면, 1인칭의 나는
그 안에서 아프고, 흔들리고,
두려워하지만,
쓰는 순간,
3인칭의 또 다른 내가
이 사건 속 나를 겸허히 바라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 내가 지금 이런 말에 무너지고 있구나.
내가 이 장면에서
이렇게까지 아팠던 이유가 있었구나.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감정의 이름이
이거였구나.
그렇게 쓰는 동안,
나는 내 삶의 한가운데서
조금씩 바깥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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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글쓰기의 힘은
감정을 없애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게
해주는 데 있는 것 같다.
쓰지 않을 때의 나는
그날의 기분이 곧 내가 되고,
그날의 사건이 곧 내 모든
인생을 잠식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쓰고 나면 알게 된다.
오늘의 감정이
내 인생 전체는 아니라는 것을.
지금의 흔들림이
내 인생의 결론은 아니라는 것을.
한 장면은
그저 삶에서 주어진
하나의 장면일 뿐,
어떤 한순간이
인생을 송두리째 삼키는
방향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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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쓰는 순간,
인생의 판도가 달라진다.
내가 겪는 일을
그저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읽어내고 조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허우적거리는 사람에서
관찰자가 되고,
관찰자가 되면서
조금 더 정확하게
나의 인생을 보게 되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 인생을 읽을 수 있게 된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지금 이 장면이 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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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삶이 버거울수록
더 많이 써야 한다는 걸
배워가고 있다.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눈앞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조금 더 멀리 보기 위해서.
지금 내 삶의 흐름이
어디쯤 와 있는지를
읽어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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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면
사람은 살게 되고,
살다 보면
일희일비를 넘어
조망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잠4:25-27, 새번역]
25 눈으로는 앞만 똑바로 보고, 시선은 앞으로만 곧게 두어라.
26 발로 디딜 곳을 잘 살펴라. 네 모든 길이 안전할 것이다.
27 좌로든 우로든 빗나가지 말고, 악에서 네 발길을 끊어 버려라.
[Pr 4:25-27, NIV]
25 Let your eyes look straight ahead; fix your gaze directly before you.
26 Give careful thought to the paths for your feet and be steadfast in all your ways.
27 Do not turn to the right or the left; keep your foot from ev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