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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자가 다 책임지세요

뉴스 제보 경험담

by 안스텔라

잃을 직장이 없어 직장을 잃지는 않았다. 다만 일상적 불편을 감당해야 했다. 제보자는 그런 거였다.

어쩌면 조금 귀찮은 일일 뿐이겠거니 했다. 신분을 노출하지 않는 조건이라면(대부분의 미디어가 표면상으로는 의무적으로 취재원을 보호한다) 해 볼 만하지 싶었다. 평소 즐겨보던 채널의 종편 뉴스에 제보했다. 막상, 제보는 웹사이트에 글을 남기거나 이메일을 보내는 것 이상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제보자가 당하게 되는 결과의 무게, 현실을 몰랐다. 공공의 안녕 또는 정의를 위해 제보 의지가 있거든 미리 숙지해야 할 사항을 (잊기 전에) 정리해봤다.


1. 인터뷰용 차림을 준비해야 한다.

제보자를 전면으로 노출시키지 않는다 뿐이지 카메라는 인터뷰이의 뒷모습, 어깨선, 악세서리 등을 향한다. 그 몇 가지 단서만으로 관계자 혹은 지인들은 제보자가 누군지 식별할 수 있다. 따라서 안 입던 옷이나 머리스타일을 가리는 큰 모자, 라인이 드러나지 않는 오버사이즈 점퍼를 입고 인터뷰에 응하기를 권한다.


2. 취재진의 일부가 될 각오.

나의 경우 직접 겪은 사례를 통해 기관의 부당함을 제보했다. 그것이 어떻게 부당하고 공공의 이익을 해치는지 설명했다. 제보 내용에 공감한다는 취재진이 인터뷰를 요청했다. 글로써 제보한 지 반나절 만에 받은 전화 연락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소재 혹은 실사례를 주는 것으로 제보자의 역할이 끝날 줄 알았다. 취재진은 이외에도 기관 관련 정보나 자료를 구체적으로 요구했다. 직접 취재로 넘어가지 않고 제보자를 거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인데, 제보를 했으니 취재 과정을 책임 져야했고 팩트 체크도 내 몫이었다. 몰래 동영상을 찍어달라, 저 각도로 다시 찍으라, 좀 더 천천히 걸으면서 해 봐라 등 촬영 하청을 받았다. 영화 속 스파이가 된 기분이었다. 꺼름칙하고 위험했지만 보도를 위한 일이라고 하니 꼭 해야만 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어리석었다). 방송이 나간 이후 건물 내 CCTV를 돌려본 관계자가 나를 따로 호출했다.


3. 뉴스 선택.

어느 매체, 어떤 방송이나 뉴스를 통해 제보할지 정말 신중해야 한다. 잘못 고르면 내가 제보한 내용, 즉 취재를 의뢰한 취지와 달리 그들이 원하는 메시지를 담은 기사가 보도된다. 그들이 최근 집중하고 있는 이슈나 보도 방향에 따라 왜곡 보도될 가능성이 있다. 거기에 플러스, 늘 입던 스타일로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하고 결국 신분이 노출되어버리기까지 한다면 제보자는 기사가 나간 시점부터 겹겹히 불이익을 당한다. (바로 내 얘기다)



나는 공중파 뉴스 대신 세월호를 계기로 선호하게 된 종편 방송사에 내용을 제보했다. 나중에 비교하고 안 사실이지만, 해당 방송사는 타 뉴스 방송과 달리 제보자 노출에 관대한 편이었다. 방송이 나가고, 내 제보에 관해 전혀 몰랐던 지인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고발 상대 기관으로부터도 호출 당했다. 다들 제보자가 누군지 알아봤다. 인터뷰한 그 자리에서 신변이 충분히 보호되도록 영상효과에 신경 써 달라고 부탁했었지만, 해당 종편기자는 그게 할 만큼 한 것이었다며 내 항의에 장문의 메시지로 답했다. 지인이라면 누구든 알아볼 만한 미미한 효과가 그 매체의 보호 기준이었다. 제보자를 보호하는 기준과 자세는 매체마다 다르다.


검증이나 신중한 취재를 위해 보도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할 줄 알았는데, 인터뷰 몇 시간 안에 내 인터뷰가 당일 저녁 뉴스로 송출됐다. 해당 기관에 직접 취재하기보다 내가 말한 정보에 의존했으므로 시간을 들일 것도 없었다. 꽤 치명적이고 위태로웠던 제보의 경험은, 인스타그램 후기급으로 순식간에 기사화됐다.


뉴스에서는 기자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그럴 듯한 자료 화면이 앞뒤로 깔렸다. 기자는 내가 하지 ‘않은’ 말을 인용해서 문제를 해석하고 보도했다. 차라리 인용하지 않고 다른 취재에 근거했다면 공정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물리적으로(몇 시간 내 보도했으므로) 다른 소스나 근거를 찾기는 불가능했을 터였다. 결국 보도는 내가 하지도 않은 말로, 자극적인 요소를 강조하며 기관을 질타하는 것으로 갈무리됐다. 매체의 방향성에 따라 그들만의 논지가 결정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해당 방송사의 필요에 따라 인터뷰는 일부만, 왜곡된 형태로 쓰였다. 인터넷에 뜬 해당 뉴스 게시물에는 비아냥 댓글이 달렸다. 사람들은 오해했다.


어느 뉴스에 제보하느냐에 따라 제보 동기와 취지에 맞는 파급력을 기대할 수 있다. 파급까진 못갈지언정, 적어도 용기 낸 목소리가 정직하게 울리느냐 혹은 허망하게 이용되느냐의 차이.


제보자는 불편하고 안전하지 않았다. 망했다. 이럴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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