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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 미안하게도 기회라면

말갛게 되살아나는 것들이 있다

by 안스텔라

미국에 있는 지인이 두루마리 휴지가 한 달 치도 안 남았다는 글을 포스팅했다. 감염 자체보다 먹고 쓸 것에 대한 우려가 먼저였다.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는 가장 인간적인 삶을 위협받는다는 게 얼마나 난감할지 아득했다. 남편과 나는 공포의 시절과 사재기가 장기화될 경우를 상상해봤다.


"대체 상품이 주목 받지 않을까? 빨리 소모되는 제품 대신 오래 쓰는 것들. 천기저귀 천생리대 같은."
"쓰레기는 많이 줄겠네."
"많이 쓰고 많이 버리는 낭비는 눈총을 받게 되겠지."


중세시대에 기침이나 재채기를 통해 흑사병이 퍼지던 시절, 유럽의 인구 30퍼센트가 사망했다. 그 후 영미권과 유럽에서는 지금까지 기침이나 재채기하는 사람에게 축복의 인사(bless you)를 건네는 것이 문화로 자리잡았다. 지하철이든 엘르베이터든 초면인 사람끼리 타인의 재채기에 습관적으로 인사를 건네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코로나19 시절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에 따라 현재의 라이프스타일 역시 관습이 되고 문화로 흡수되지 않을까. 한국에도 변화를 예상해보게 된다.


근무 여건, 상권의 서비스 형태, 사람과 사람의 습관적인 접촉 등은 사람 간 전염이 확산되지 않도록 달라져야 했고 실제로 달라졌다. 교대 내근 혹은 재택 근무의 실효성을 경험한 회사들은 코로나 사태가 끝난 후에도 구조적 변화를 적용하고 유지할 것이다. 앞으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집에 방역복이나 마스크를 상비해두는 사람들이 늘어날 거고, 아시아 국가도 기침할 땐 입을 소매로 가리는 등의 매너가 일상적, 아니 필수적 습관이 될지 모른다. 더욱 조심하고 신중하면서 서로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의미, 형식이 아닌 효율을 우선시하는 시스템의 변화는 순기능이다. 어찌됐건 공포의 발로가 아닌 문화로 자리잡기까지는 코로나19의 종식이 먼저다.


강제적으로 집에 머무르도록 한 나라들의 SNS 사용자들은 자가격리의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포스팅하기 시작했다. 장난과 위트가 끊이지 않는다. 뭉클하게 아름다운 사진과 동영상도 많다. 적막만이 흐르는 도시에서 창문을 열고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이 있고, 할아버지와 손녀가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느라 찻길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서서 춤을 추고, 각국의 매체가 자국의 의료진에게 감사와 격려의 인사를 보내고, 의료진들 역시 격리 중인 일반인들에게 영상메시지를 보낸다.


가장 찡한 현상은 말갛게 되살아나는 자연이다. 이탈리아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는 수십 년만에 처음으로 흙탕물이 걷히고 물고기가 노니는 모습이 발견됐다. 사람을 제외한 온 생명이 맨얼굴을 드러내는 현상. 참으로 영롱하고 보고 있자니 민망하다. 사람이 삼가면 땅이 살아난다.


코로나19 이후 억지로 집에 머무르는 동안 전에 없던 가족의 시간이 생겼고 온몸을 뒤트는 지루함 속에서 사람들은 갖가지 아이디어로 자생력을 기른다. 놀이 서비스와 상품, 레저산업에 의존해 짜여진 판에서만 소비하던 우리가 알아서 놀아야만 하는 필연적 과제를 맞았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활동을 창출하고 관계의 결을 확인하고 타인에 무심했던 일상을 인정한다. 그리고 맑아진 자연 앞에서 그동안 내가 소비한 즐거움의 참담한 결과를 만나는 동시에 회복을 발견한다. 강제적이지 않았다면 절대 가질 수 없었던 시간, 기회다.


교양있고 여유있고 건강한 사람들이 약간의 불편을 경험하며 거대한 교훈을 얻는 동안 그 값을 수많은 죽음이 지고 있다. 현재 세계 확진자는 80만 명에, 사망자 수는 4만에 육박한다. 안전 사각지대에서 떨고 있는 빈곤층과 노약자는 무기력하다. 교훈을 얻으면 얻을수록 우리가 삼가는 마음으로 희생자를 돕는 의무를 지어야 하는 이유다.


이 시절의 치명적인 피해자가 아니라면 지금의 억지스러운 여유를 유의미하게 소비해야 한다. 전염병 때문에 생계를 잃은 사람과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과 피부가 헐도록 일하는 의료진과 긴급 대체 서비스를 제공하는 손길을 기억해야 한다. 생활비의 100분의 1이라도 떼어 절박함에 동참하는 것이 공포의 역사 가운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자 참여가 아닐까. 이 역시 가만히 있을 새 없이 살았던 나에게 주변을 기억하고 돌아보는 억지스러운 ‘기회’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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