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같이 키운다?
감지하는 데는 2초도 걸리지 않았다. 언니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잠깐의 외출에도 숱 많은 머리카락을 매만져 마디마다 컬을 넣던 사람이었다. 옷은 색과 리듬을 놓지 못해 각잡힌 자켓, 준비된 매치만 입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비듬 가득 박힌 머리를 엉성하게 묶고 점퍼 단추는 띄엄띄엄 잠근 모습으로 나타났다. 오는 길에 어떤 행인이 느닷없이 소금을 뿌려서 당했다고 하면 믿었을 거다. 그렇게 굵고 압도적이며 당당한 비듬은 처음 봤다.
- 그 애가 죽었어. 식탁 위에 앉아 있고, 이불 위에서 몸을 말고 내 가까이 누워. 집에 있으면 계속 그 애가 보여.
언니의 고양이가 죽었다. 갑작스러운 사고였다. 몸의 일부를 떼어내 주어도 아깝지 않을 존재였다고, 그런 사랑의 대상은 처음이었다고 말하는 언니의 눈빛이 멍했다. 말을 하다 말고 갈라진 입술을 긁어 죽은 껍질을 뜯었다. 며칠 전부터 약을 처방 받았다. 그래야만 공포스런 일상을 버틸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 역시 슬픔을 토하며 괴로워했지만 그녀만큼 일상이 파괴되지는 않았다.
- 나한테는 가족이고, 우리에게 자식이니까.
그러게.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대상은 내 몸의 일부와 다름없지. 잠에서 깨자마자 눈꺼풀을 부비는 손등의 습관처럼 매일 반복되는 아침같은 존재였겠지. 아침이 떠나가서 어둠이 내렸구나. 언니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무서웠다. 그 자리에 그것이 없어. 내 곁에 네가 없어. 그런 어둠이라니. 그런 절망이라니.
그래서 말인데...정말이지 개와 고양이는 절대 자식과 같을 수가 없겠다.
나는 마음 속으로만 말했다. 아기를 돌보는 일상을 살아가며, 습관보다는 의무로, 언젠가 떠나보낼 날을 상상하는 나를 언니는 이해하기 어렵겠구나, 생각했다. 단단히 살아있는 채로 더 없이 뿌듯한 얼굴을 하고서 자신의 길을 가는, 내 몸보다 귀하게 돌보아 온 내 몸의 일부가, 몸 밖으로 떼어지는 이별을. 머지 않아 나보다 더한 생존력으로 나를 딛고 살아갈 존재를 양육하는 일의 의미를.
자식은 그랬다. 지난 달과 이번 달이 다달이 달랐다. 날이 다르게 기능을 더하고, 하루아침에 기가 막히도록 진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전과 같은 음식, 전과 같은 놀이를 들이밀 수 없었다. 그림책을 가만히 마주하지도 못해 종이 위에 침을 흘리던 아기가 몇 달 뒤에는 책장을 넘기며 마음에 드는 페이지를 짚었고, 장난감 자동차 바퀴를 굴려서 멀리 보내는 놀이에 맛들였나 싶다가 어느 날은 엄마의 가슴을 토닥토닥하며 재워주는 시늉을 했다. 얼마나 빠르게, 얼마만큼의 보폭으로 다른 모습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었다. 어린이집에서는 친구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는데, 부모의 훈육이 닿는 곳에는 한계가 있었다. 가정에서 사랑의 확신을 주겠다고 친절을 가르치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것과 별개로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미움 받고 미워하고 사랑 받고 사랑 주는 과정은 그만의 방식으로 흘러갔다. 조직의 규율과 사회의 법칙을 매년 새롭게 배워야 했다. 아이는 아이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내가 모르는 세상을 감당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성큼성큼 나아가는 아이를 나와 다를 바 없는 인격체로 인정해야만 하고, 때가 되면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내 마음과 간섭을 단속시켜야 했다. 예측가능한 패턴으로, 꾸준한 돌봄의 형태로, 신변의 변화가 없는 한 언제까지나 함께 살아갈 개와 고양이의 돌봄과는 성격이 달라도 한참 달랐다. 차원이 다른 혼란과 좌절과 보람과 교훈이 뒤섞인 당황과 기적을 안고 사는 것이 육아였다.
애틋함이 절절한 것은 비슷했다. 내가 채워줌으로써 완성되는 존재에 대한 마음은 사랑 그 이상이니까. 내 돌봄 없이는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를 공급 받지 못하는 대상은 내 의무이자 사명이며, 존재의 이유가 된다. 내 몸과 다름없는 몸. 내가 쪼갠 시간, 내 일상, 내 인생이다. 사람 이외의 동물을 키워본 경험이 없음에도 내가 반려견과 반려묘를 사무치게 사랑하는 마음들을 감히 와닿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세상 그 어느 동물보다 무기력한 인간을 키운 경험 때문이다.
턱의 각도를 잡아주지 않으면 코앞의 젖을 물지도 못하고, 고작 네 시간 수분 공급이 없으면 치명적인 탈수가 오고,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욕망의 대상을 쳐다보면서 제 관절을 뜻대로 사용할 줄 몰라 참담하게 울부짖고, 제 발로 원하는 위치에 이동하기까지 장장 1년이 넘게 걸리는 어이가 없도록 무능한 동물을 키우면서, 내 돌봄 없이 생존하지 못하는 대상에게 무한한 애정과 책임감을 쏟는 체험을 했다. 사랑, 그 이상의 끈끈함이자 생존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생존이었다.
그렇게 생존과 존재의 의미가 된 대상을 20년 가까이 지켜보다 어느덧 나보다 나은 존재가 되었을 때. 그를 인정하기는 어려울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내 피와 살을 떼어 먹인 시간을 지나 어설픈 성장의 과정을 십수년 지원했는데, 어느덧 어엿한 개체라며 떠나가는 모습을 목도하는 일, 그 무조건적 사랑과 당혹감, 인격적 충돌과 기적적 감격의 경험은 '자식과 같은 반려견/묘'를 통해 얻는 경험과는 도무지 결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