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들의 저의는 썩 바람직하지 않았다
긴박해진 아기는 원숭이 소리를 냈다.
- 오오오오!
거인이 엎어져 곤두박질치는 장면이었다. 바로 앞장에서는 거인이 주식으로 인육을 먹는다는 암시와 함께 거친 눈빛과 뭉툭한 코가 무시무시한 그림으로 강조되고 있었다. 그런 거인이 육중한 몸을 땅에 내리꽂으며 넘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생동감을 내려 목소리를 탁하게 냈다가 가볍게 냈다가 하며 책을 읽었다. 거인이 잠에서 깨어나자 소스라치게 놀라는 잭을 따라서 나도 몸을 휘청였고, 거인이 낙하하는 부분에서는 바닥을 내리치며 효과음을 냈다. 쿵!
- 어어어어어어어어 오오오오오!
- 맞아, 그렇게 거인이 쿵!하고 떨어진거야!
아기는 서둘러 몸을 낮췄고 바닥에 머리를 찧은 거인과 얼굴을 맞댔다. 찡그린 표정을 보니 저도 아픈 모양이었다. 아야아야아야! 그리고는 그림책에 입김을 불었다. 아픈 사람에게 호오-해주는 거라고 일러주었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아기 머리와 뒷꿈치, 엉덩이와 손가락에 우리는 뜨거운 입김을 불어주곤 했으니까. 호오-해줄게, 금방 나을 거야, 하고.
- 하지만… 잭을 죽이려던 그 거인이잖아?
입김을 부는 천진한 모습이 재밌어 나는 성급하게 몰아붙였다. 무서운 거인인데 호-해주는 거야? 아기는 여전히 거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묘했다. 등이 차가웠고 방금 뱉은 질문이 뒤에서 나를 흘겨보는 느낌이 들었다. 좋은 질문은 아니었나봐. 도움이 필요한 대상에게 친절을 나누는 일은 정의롭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평가한 후에 손을 내민다면 이미 늦을지도. 그렇게 생각을 수정해보는 나야말로 이미 늦은 셈이었다. 몸을 접고 바짝 엎드린 채 거인을 어루만지는 아기 손이 너무 예뻐서 마음이 먹먹했다.
남편이 즐겨 읽는 책은 강아지 그림책이다. 스토리는 없다. 그저 다양한 형용사를 알려주는, 대놓고 언어 학습용 책. 큰 멍멍과 작은 멍멍, 기쁜 멍멍과 슬픈 멍멍, 졸린 멍멍과 깨어난 멍멍 등 서로 다른 특징을 대비시켜놨다. 아기는 그림을 번갈아 보며 아빠가 읽는 멍멍에 따라 멍멍했다. 개 고양이 할 것 없이 동물소리라면 눈이 동그래지는 데다, 산책길 거리의 길고양이를 내버려두는 법이 없으니 멍멍 소리가 마냥 반가울밖에. 기쁜 멍멍과 슬픈 멍멍, 더러운 멍멍과 깨끗한 멍멍. 아기는 침을 묻혀가며 멍멍이들에게 입을 맞췄다. 공평하게 이쪽 한번, 저쪽 한번.
- 잠깐만. 이 친구는 더러운 멍멍인데?
- 뽀뽀. 뽀뽀오
고집스럽게 입을 맞추는 아기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남편은 키득거리며 거듭 되물었다. 더럽잖아, 더러운 멍멍이잖아? 그래도 해주는 거야? 곁에서 보던 나 역시 덩달아 웃었는데 곧이어 잭과콩나무가 떠올랐다. 웃는 내 얼굴에 죄책감이 들었다. 입을 맞출 대상까지 우리가 정해줄 순 없지. 중요한 문제였다.
- 우리 대화 좀 해.
습관적이고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우리의 말과 그 말이란 말들의 저의는 썩 바람직하지 않았다. 쟤는 나쁜 짓을 했으니까 도와주지마. 더러운 친구하고 가까이 지낼 거야? 실은 그런 말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조금 전의 경험을 짧게 곱씹던 남편은 전적으로 동감해주었다. 선의의 행동을 어째서 의외라고 느끼고 황당해했는지, 지금까지 우리는 무엇을 당연하게 여겨왔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견 없이 사랑하는 일이 우스웠나. 도움을 실천하는 모습이 엉뚱했나. 내심 그리 느꼈어도 더럽다느니 나쁘다느니 입밖에 내서는 안 됐는데.
더 부끄러워지기 전에 생각 좀 하기로 했다. 생각 좀 하고 말해야겠다.
맑은 곳으로 가려는 아이의 목덜미를 잡아당기지 말아야지, 가만히 배워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