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가을의 군입대 전 이벤트
가을은 어느덧 시간이 흘러 여엇한 대학생이 되었고 군입대를 목전을 둔 채 대구 본가에서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가을은 1994년 전 세계적인 농구 열풍에 편승하여 농구선수가 되고 싶었고 급기야 농구부가 있는 국민학교로의 전학까지 가는 열의를 보였다. 또래에 비해 다소 큰 체격의 가을은 이미 농구선수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은 갖춘 셈이었다. 이후 야구계(?)와의 인연은 자연스레 멀어져 갔었다.
가을은 2001년 농구 특기생 전형으로 대학에 진학했으나 부상에 이은 실력 하락은 조기 은퇴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쉽지 않은 은퇴 결정 후에도 농구에 미련이 남은 가을은 농구 심판 자격증을 획득하여 아마추어 농구 심판으로서 활동하였다. 2, 3년 간 활발한 심판 활동을 하던 중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충격의 입영통지서를 받은 후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대구에 내려와 있었던 것이었다.
*가을의 농구 얘기가 궁금하다면 "나는 운동부 출신입니다"를 읽어보시길 적극 권합니다.
2003년 당시 삼성 라이온즈에는 “이승엽”이라는 프랜차이즈 선수가 등장하여 홈런타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화려한 리액션과 말솜씨, 불량하고 거만한 모습이 아닌 항상 겸손하고 침착하며 언제나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다른 선수의 귀감이 되는 선수였다.
한편, 이승엽 선수는 가을이 농구에 전념하던 시기에 등장하였다. 1995년 시즌부터 삼성에 합류하여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하면서 시행착오를 겪었으나 성공적으로 타자로의 변신을 이루어냈다. 1997년 시즌부터는 30개 이상 홈런을 치더니 1999년 시즌에는 두산의 외국인 선수인 타이론 우즈와의 홈런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였다.
또한, 종전의 빙그레 이글즈(현 한화의 전신이며 주황색 줄무늬 유니폼이 특징이었다)의 장종훈 선수(연습생 신화의 주인공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40 홈런 기록을 보유했으며 빙그레 이글즈 최초의 영구결번(35번) 레전드 선수이다)가 기록한 41개를 훌쩍 뛰어넘은 54개란 믿어지지 않는 홈런 기록을 세웠다.
세기말 충격 그 자체였다.
가을은 이 당시 한창 농구에 빠져 있었지만 이승엽 선수가 1998년 우즈와의 홈런 경쟁에서 패배한 이후의 기록 경신이라 훨씬 통쾌하고 자부심을 느꼈었다.
전 세계는 세기말 공포에서 무사히(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이 당시 그 예언가는 그 옛날 1999년이면 세상이 멸망한다고 예언했기에 다들 밀레니엄은 보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벗어났지만 이승엽은 밀레니엄 시대에 세기말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1999년 개인 기록으로 정점을 찍은 후 하락세가 이어졌다.
2001년, 2002년 시즌에는 다소 주춤했던 것. 이 시절, 프로야구의 인기는 오늘과는 사뭇 달랐다. 아마 야구 인기의 하락세는 2002년 월드컵의 영향이 상당 부분이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히딩크의 오대영 사건 등의 시작되는 축구에 관한 관심은 월드컵 첫 승, 사상 첫 16강 진출, 강팀 이탈리아와의 승리로 8강 진출, 스페인과의 승부차기에서 승리하여 진출한 4강 신화까지 온 국민이 축구 열풍에 빠져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야구장에는 야구 덕후들만 휑한 좌석을 메워줄 뿐이었다.
2003년 마지막 경기 vs 롯데 자이언츠
그 당시 이승엽 선수는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경신하는 데 불과 1개의 홈런만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1964년 일본의 왕정치 선수가 55개의 홈런을 쏘아 올린 것이 아시아 홈런 신기록이었지만 이승엽 선수는 그 기록과 타이인 55개를 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 메이저리그가 있는 미국조차 이승엽 선수의 홈런 신기록 달성이 초미의 관심이었다.
2003년 10월 2일 대구 시민야구장 삼성라이온즈의 홈경기.
그는 롯데 자이언츠와의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가을은 이승엽 선수가 이 경기에서 홈런을 치지 못한다면 아시아 신기록 경신의 기회는 영영 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가을은 생애 마지막일 수 있는 이 역사적일 수 있는 경기 티켓을 구하지 못해 아쉽게도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TV로 시청해야만 했었다.
사실 롯데와의 마지막 경기 전, 9월 27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롯데는 8회 초 이승엽과의 승부에서 고의사구로 그를 내보냈다. 이에 흥분하고 실망한 관중들은 경기장에 불을 지르고 오물을 투척하거나 경기장에 난입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승엽 선수의 아시아 신기록 홈런볼을 차지하기 위해 잠자리채 부대까지 동원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던 터라 이승엽의 고의사구는 그들에게 큰 실망과 좌절을 안겨줬을 것이다.
이 해프닝으로 롯데 구단에서는 2017년 이승엽 선수의 은퇴투어 당시 잠자리채를 준비하여 이대호 선수가 전달하면서 주변의 웃음과 그 당시의 상황을 추억하기도 했었다.
다시 마지막 경기로 돌아와서, 경기는 2:0으로 삼성이 지고 있는 7회 말 상황.
이승엽 선수는 마지막이 될 수 있는 타석에 들어섰고 상대 투수는 이정민이었다. 이정민의 첫 번째 투구한 공은 높은 볼, 두 번째는 가운데로 들어온 직구 스트라이크. 이 볼을 쳤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볼 카운트는 1-1 상황, 투수는 세 번째 공 역시 가운데의 직구로 승부했었다.
하지만 살짝 안쪽으로 들어가는 실투성 투구가 던져졌고 이승엽은 이 공을 놓치지 않고 좌중간 담장을 살짝 넘기는 솔로 홈런이면서 56호의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그 순간! 가을이네 가족은 감격에 겨워 서로 얼싸안아 환호성과 만세를 불렀다. 굽고 있던 삼겹살이 모두 엎어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의 신기록 달성이 마치 내 일인 양 함께 기뻐했다. 기쁨의 환호성은 가을이네 뿐만 아니라 옆집과 그 옆집도 마찬가지였다. 월드컵에서의 극적인 결승골을 넣을 때나 들을 수 있는 엄청난 함성은 그칠 줄 몰랐다.
대구구장에서는 56호 홈런에 맞춰 56개의 축포가 터져 가을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으며 그 당시 경기가 있을 때마다 등장한 대형 잠자리채 부대는 단체로 채를 흔들거리며 축하를 해주었다. 56호 홈런볼을 잡은 사람은 삼성 라이온즈 측에 그 공을 기증하여 훈훈한 마무리로 이어졌다.
가을은 이만수 선수 이후 만난 자신의 영웅이 빛나는 모습을 본인의 군입대 전 마지막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후 의정부에 위치한 102 보충대에 입소하였고, 이후 경기도 문산에 위치한 제1사단에서 2년 간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다.
가을에게 있어 2003년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의미 있는 한 해로 기억되었다.
이번 이닝에 못한 얘기는 다음 이닝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