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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Answer Apr 06. 2022

실망감마저 느끼지 않는 12년 차 교사에게 보내는 위로

오늘 학교 내 모든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수업 초대장”을 보냈었다. 다음 주 금요일(15일)까지 원하는 때 수업 참관을 제안했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운동과 건강 수업을 전담하고 있는 나로선 2학년 담임 선생님을 비롯하여 2학년 담당하고 있는 교과 선생님에게 우리가 가르치는 학생들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아무도 참관하지 않았다. 사실, 준비하면서도 거의 참관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씁쓸한 것은 선생님들께서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었다. 수업 나눔을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안자 스스로 아무도 참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그 자체가 서운함보다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스스로 서운함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감정마저 느끼지 않았던 것이 더욱 큰 아픔이었다.

점차 학교에서 행해지는 행사나 활동에 학생을 비롯한 학부모, 교사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 지으며 준비하는 모습이 자신에게 안쓰러움을 자아낸다. 혹자는 열심히 무언가를 준비하는 내 모습을 보며 호응도가 낮아 실망할까 봐 걱정을 하지만 애초에 기대치가 낮기에 실망감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나만 그런 것인지, 많은 교사들이 나와 같이 느끼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 자신의 만족감이 타인의 참여와 호응보다 더 크다. 어쩌면 타인에 대한 실망감과 상실감에 따른 상처를 애초에 받지 않으려는 나만의 방어기제일 수도 있겠다 싶다. 이러면서 세상사에 크게 개의치 않게 되는 것인지, 무슨 일에 감동을 받거나 영감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인지. 사회에서 말하는 기성세대가 되어 가는 내가 경계해야 할 것은 아마 상처받지 않기 위해 무덤덤해지는 내 모습이 아닐까. 그렇다고 상처를 받는다면 아플 것 같긴 하다. 다시 일어서지 못할까 봐 겁도 날 것 같다.


워츠, 희망(Hope), 1886


어쩌면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희망”이 아닐까. 김태현 선생님의 책 [교사의 시선] 끝자락에는 워츠의 희망(hope)이란 그림을 소개하며 교육에서의 희망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면서 워츠의 말을 인용하고 있었다. 말인즉 이렇다.


“ 나는 두 눈이 가린 채 지구 위에 앉아, 모든 현이 끊어지고 하나의 현만이 남아 있는 수금으로, 가능한 한 많은 소리를 내도록 노력하고,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희망의 그림을 그리는 작가다”


위에서 말했던 자조 섞인 나의 푸념은 어쩌면 워츠의 말처럼 희망을 품고 있기에 가능한 것은 아닐지 조심스레 나 자신을 위로해본다. 서운함과 실망감마저 느끼지 않는 12년 차 교사가 그래도 교육에서, 학교에서 희망을 안고 있기에 묵묵히, 열심히, 즐겁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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