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들을 위해
벚꽃이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낸 후 다음 꽃들에게 배턴을 넘기고 있는 이때, 학교에는 튤립을 비롯하여 철쭉이 그 영롱한 자태를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운동장에서 수업을 하다 보면 그 모습이 점점 퍼지는 듯한 느낌을 받지만 정작 내 관심은 돌계단 사이를 비집고 활짝 핀 민들레에게 향한다. 노란 꽃망울을 피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지만 화려한 꽃무리들에게 묻혀 관심을 받지 못하는 듯하다. 교실에서나 운동장에서도 그 같은 아이들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말썽을 부리는 아이, 공부나 운동을 잘하는 아이 등등 눈에 띄는 이들한데 가려 본의 아니게 소외받는 학생들이 있다. 수업을 하면서는 놓치기 십상인 이들은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비로소 눈에 아른거리곤 한다. 뚜렷이 잘 기억나질 않지만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교사로서 뭔가 챙겨주지 못한 아쉬움이랄까.
그들은 개의치 않거나 소외 자체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느끼지도 못할 만큼 내성이 생겼거나 관심 자체를 받아보지 못했기에 그 같은 감정을 알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다. 누군가가 이런 얘기를 한 것 같다. “분노할 줄 알고, 슬퍼할 줄 아는 이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이 같은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줄 아는 법을 알려주고 있는 것일까?
꽃 얘기를 꺼내니까 떠오르는 이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인 “고흐”다. 살아생전에 수많은 “해바라기”를 그렸던 그는 아메리카가 원산지인 해바라기 그림으로 아를에 있던 방을 꾸미고자 했다. 바로 친구이자 동료였던 “고갱”을 위해서. 고갱이 페루계 프랑스인 점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한편, 그 당시 해바라기는 작가들 사이에서 잘 그리는 주제는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투박한 모습이어서 남들의 이목도 끌지도 못해 작품 주제로는 모자랐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런 꽃을 고흐는 좋아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유명한 작가들 사이에서 빛을 보지 못하는, 그들에 비해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신을 닮았다고 여겼었을지도 모르겠다. 연민이랄까.
학교에서도 투박하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학생들이 있겠지. 나로선 그들이 자신의 길에 확신을 갖도록 도움을 주고 관심을 가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