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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문연 Jun 27. 2016

스타일 코치 칼럼 #8 외모로 판단되는 사람들의 선택

쇼미더머니5 원의 탈락을 보고

쇼미더머니5를 재밌게 보고 있다.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진 래퍼와 프로듀서 그리고 그들의 조합에 따라 달라지는 방향성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이번 7회에서는 잘생김을 입은 원이 탈락했다. 원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사람들(프로듀서 포함, 참가자, 시청자들까지)로 하여금 그 잘생김에 빠져드는 비주얼을 선사했다. 개인적으로 잘생긴 얼굴은 남자답게 생긴 유형, 미소년 유형, 조각같은 미남 유형 으로 나눠진다고 생각하는데 원의 얼굴은 남과 여가 공존하는 '아름다움'에서 오는 잘생김이 아닌가 판단해본다. 그래서 프로듀서들이 볼 때마다 잘생겼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그건 남자가 잘생긴 남자를 보는 것에서 오는 감탄이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것에서 오는 감탄이라 느껴졌다.


우리는 얼굴이 잘 생기거나 예뻤을 때 그에 상응한 대우?를 받는 것에서 축복받은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원을 보며 잘 생기건, 못 생기건 '외모'로만 판단 되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원은 1회부터 래퍼로써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사실 시즌4에 나왔을 때도 그 비주얼로 주목받았지만 자기만의 색깔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듯이 모든 탈락(또는 실패)이 납득이 가면 좋겠지만 쇼미더머니에는 납득이 가는 탈락과 그렇지 않은 탈락이 공존한다. 하지만 원의 탈락은 충분히 납득할만한 탈락이었다. 잘생긴 원은 잘생긴 것 외에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주지 못했고 시즌4에서 사라졌다. 잘생김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원에게는 래퍼로 인정받기 위해 뛰어넘어야 하는 강력한 정체성의 벽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한 원이 쇼미더머니5에 다시 나타났다. 잘생김이라는 핸디캡(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쇼미더머니에서 원의 외모는 핸디캡으로 작용했다고 본다)을 넘어 랩이라는 본질을 보여주기 위한 재도전이었다고 본다. 내가 어떤 요소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으면 좋겠다는 '의지 or 열망 or 욕망'은 내가 원하는 나의 정체성의 연장선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외모가 '이러이러 했으면 좋겠다'하는 열망은 내 정체성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며 현재 그렇게 보이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불행감을 초래하기도 한다. 원은 본인이 원하는 래퍼로서의 정체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모'로만 판단되는 것에 있어 무게 중심을 '랩'으로 바꾸고자 노력했고 그것이 잘 발현된 것이 이번 7회의 [맘편히] 무대였다고 생각한다.


프로듀서(쌈디 & 그레이)와 원의 합동 무대였던 [맘편히] 공연을 보면서 프로듀서의 곡 선택이 탁월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프로듀서는 래퍼들이 자신의 강점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돕고 그들 스스로는 깨기 어려운 틀을 깨는 것으로 잠재력을 끌어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맘편히]에서 했던 원의 랩은 지금까지 원이 보여준 래퍼로서의 모습보다 한 단계 발전한 모습이었다. 내가 원하는 정체성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사람들은 자신감을 갖고 그 상황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뭔가 2% 부족하고 어색하고 긴장했던 원의 모습은 스스로가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랩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며 프로듀서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았기에 자신이 원하는 래퍼로서 도약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잘생긴 래퍼'라는 수식어는 TV에 나오는 상품(결국 대중들의 선택을 받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므로)으로써의 가치는 높을지언정 원 스스로가 자신을 규정하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했을 것이다. 그 너머의 래퍼로서의 모습을 원했고 쌈디와 그레이는 원이 원하는 정체성에 가까운 래퍼로서의 모습을 찾아줬다. 잘생긴 것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고 다가가기 쉽다는 점에서는 못생긴 것보다는 더(사회에서 벌어지는 차별은 이런 단순한 비교보다는 더 가혹할 수 있지만) 축복받은 재능일 것이다. 하지만 잘 생기건, 못 생기건 자신의 정체성이 외모에만 국한된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정체성은 한 가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므로 여러가지 복합적인 재능과 모습이 섞여 나타나는 것인데 외모에만 국한될 경우, 그 외모가 사라졌을 때 오는 상실감을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때 가장 멋진 아우라를 뿜어낸다. 원의 태도가 멋진 것은 외모를 넘어 자신이 추구하는 본질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모에서 오는 차별이 위험한 이유는 '뚱뚱하고' '못생겨서'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어떨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을 심어주는데 있다. '뚱뚱하기 때문에 게으를 것이다' '말랐기 때문에 예민할 것이다' '잘 생겼기 때문에 (그 외의 재능에는)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등등 우리는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자연스럽게 고정관념이 되는 의식의 흐름에 반항하지 않는다. 외모는 우리의 정체성의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주목받는 외모를 가질 수록 외모에 함몰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건강한 정체성(본질)을 갖기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며 원의 탈락이 아쉬울 지언정 미련은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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