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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문연 Oct 13. 2022

#15 (누구나 하나쯤 있는) 쳐박템이란 무엇인가?

쳐박템, 다소 과격하다. 나는 잉여템으로 지칭해왔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과격한 쳐박템으로 써보기로 한다. 갑자기 날씨가 차가워져서 가을 옷을 꺼냈다. 나야 옷박스가 하나밖에 없어 굉장히 단순한 과정이지만 이런 나도 흔쾌히, 열정적으로, 힘이 솟아, 옷박스를 꺼내는 것이 아닌 것을 보면 옷이 많은 이들의 고충이 느껴진다. 가을옷은 꺼내고 여름옷은 박스에 보관하는 과정은 얼마나 귀찮고 에너지 소모적인가. 물론 이러한 과정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과정을 끔찍이 싫어하는 이들의 공통점을 생각해본다면 일은 많되 생산적이지 않은 결과에 있어 보인다. 단순히 입을 옷을 꺼내고  입을 옷은  보이는 곳에 보관하는 과정.


하지만 우리 삶에는 늘 생산적인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생산적이지 않은 일을 한다고 내가 비생산적인 사람인 것도 아니고. 뭔가를 끊임없이 하고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쩌면 매 순간 나를 움직여야 살아있는 느낌을 받는 것일까? 한시라도 가만히 앉아있으면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아니면 그런 나를 보고 다른 사람이 나를 쓸모없다고 느낄까봐 두려움에 움직이는 걸까? 나는 내가 꼭 필요하다 싶을 때만 움직이는 나무늘보같은 사람이라 부지런한 사람을 존경하면서도 그들처럼 살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문득 든 생각인데 내 엉덩이에 살이 많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꽤 많은 시간을 앉아서 작업하는데 방석을 찾은 적이 없는 것을 보면 타고난 살 때문이리라.


계절과 계절 사이, 계절옷을 바꿔주는 이 시기에 단 한 번의 입혀짐없이 나왔다 들어갔다만을 반복하는 아이템들. 나에게도 그런 아이템들이 있다. 안 입은지 3년이 넘었지만 버리지 않고 갖고 있는 아이템. 3년이 뭐야. 2013년 첫 책 <스타일, 인문학을 입다> 출간 북토크에서 입었던 원피스는 9년째 소장 중이다. 앞으로 입을 일이 있을까? 묻는다면, 글쎄- 옷장 안에서 발견한 화석템의 기준은 10년이다. 그래서 옷장 코칭을 하다 몇 년 되었냐고 물었을 때 10년이 넘었다고 하면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비우라고 이야기한다. 사람에 따라 20년 넘게 소장 중인 화석템도 있지만 그건 극히 희박하므로 보통 10년이 일반적인데 나도 이제 1년 남았네. 지금은 안 입지만(앞으로도 안 입을 것 같지만) 버리기는 아까워 소장 중인 나의 페이버릿 화석템.


사실 이 원피스의 경우는 멀쩡하기도 하지만 첫 책 출간 북토크에서 입었던 옷이라 애정이 간다. 그래서 옷의 개념보다는 추억의 개념에 더 가깝달까? 추억이 담긴 사진은 액자에 보관하지만(요즘은 아이클라우드에) 추억이 담긴 옷은 액자에 보관할 수 없으니 꺼냈다 넣었다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신박한 정리(TV 프로그램)에서 이런 추억템을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라고 했는데 나는 쳐박템의 개수가 많지도 않고 실물을 보는 게 더 좋아 아직은 소장 중이다. 글을 쓰다보니 쳐박템이 또 있네. 하나는 모직 스커트, 하나는 검은색 H라인 스커트. 내가 평소에 치마랑 원피스를 거의 안 입다 보니 어쩌다 요런 아이템을 사면 어쩔 수 없이 쳐박템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멀쩡하고 어쩌다 다르게 입고 싶은 날이 오면 한 번쯤 입을텐데 그런 날이 오지를 않네.


그래서 모든 쳐박템이 한 카테고리로 묶이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지금은 안 입지만 앞으로도 안 입을 옷 중에 추억템인지 아니면 미련이 남은 것인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고 지금은 안 입지만 앞으로는 입을지도 모르겠는 아이템 중에 조금이라도 촌스러운 느낌이 남아있다면(물론 멋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OK) 다시 '안' 입을 확률 200%이며 내 이미지가 변하고 내 체형이 변해 내가 옷에 맞춰야 하는 상황이라면 다시 '못' 입을 확률 300%이다. 나이에 따라 이미지도 변하고 체형도 변하고 취향도 변한다. 그러므로 5년만 지나도 입었을 때 뭔가 어색한 옷이 수두룩(기본템이 아니고서는)한데 10년이 넘었다면 이 모든 변수들을 다 통과해야만 입을 수 있는 소생템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몇 년을 갖고 있든 나에게 어울리고, 내 취향에 맞고, 내 체형에 맞아야만 입게 된다.


그래서 쳐박템은 가까운 과거부터 먼 과거까지를 회상하며 추억에 잠기게 하는 타임머신인 동시에 비울지 말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애증템이다. 분명한 것은 결국 입을지 말지를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입지 않아도 갖고 있을 수 있으며 나에게 보이지 않는, 내가 몰랐던 코디술(의술처럼 코디로 옷을 살리는 것이 코디술)로 쳐박템을 살릴 수도 있다. 자 이제 옷장 속 쳐박템을 세어보자. 계절별 쳐박템은 3가지를 넘지 않는 것이 좋다. 옷의 본질은 입는 것에 있으며 추억을 담고 있다고 모든 아이템을 보관할 수는 없다. 안 입지만 아깝다고 언제까지 갖고 있을 것인가. 매년 옷을 넣었다 뺄 때마다 결정을 미루지 말라. 내가 산 옷에 대한 책임은 그 옷의 마지막까지도 결정하는 것에 있다. 옷장은 현재의 나가 중심이 되는 것이 가장 좋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옷을 남겨두지 말자.


쳐박템을 비웠다가 후회하면 어쩌냐고? 살면서 그 정도 후회도 안 하며 사는 사람이 있을까. 때론 후회하고 실패하며 입는 것이다. 비우고 채우고, 채우고 비우고 모든 삶이 그렇듯 옷장도 그렇다.


글쓴이 이문연

옷문제 해결 심리 코치

행복한 옷입기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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