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모 기관에서 일할 때였다.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 대표들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에 잘생긴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나에겐 그저 외모가 잘생긴 사람 중의 한 명이었지만 직원 한 분은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잘 생긴 대표님'이라는 수식어를 써서 불렀다. 그런 수식어가 과연 상대방에게 칭찬이었을까? 잘 생겼다. 예쁘다.하는 표현은 상대방이 원할 때만 칭찬에 가깝다. 잘 생기건, 못 생기건 외모로 어떤 사람을 특정해버리는 건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외모에 한정시켜버린다는 점에서 사람을 단편적으로만 본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외모가 출중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타인에게 호감을 준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다만 외모란, 예쁘고 잘 생긴 것을 넘어 좋은 분위기를 전달해준다는 것을 포함한다. 예쁘지 않아도 좋은 인상으로, 언변으로, 태도로 사람들을 기분좋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외적으로 전달된다는 측면에서 '외적인 매력' 카테고리 안에 같이 묶어도 무방하나 전자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정적인 비주얼이라면 후자는 말투와 표정 등을 포함한 동적인 비주얼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잘 생기고 예쁜 것이 생물학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은 맞으나 다른 요인을 발휘해 외적인 매력을 드높?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외모가 아니라 외모 권력에 있다. 잘생겼거나 예쁜 사람을 만났을 때 그 분위기?에 스스로를 종속시킨다. 비주얼이 좋은 상대방을 칭찬이라는 명목하에 추켜세워준다. 외모에 대한 지적과 외모에 대한 칭찬이 쌍으로 안 좋은 것은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외모에 국한시키기 때문이다. 지적과 칭찬이라는 표현만 다를 뿐, 동전의 양면과 다르지 않다.(물론 칭찬보다 지적이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모가 아이덴티티에서 중요한 사람은 그러한 칭찬이 좋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공고해지면서 이러한 아이덴티티는 생존과 사회적 관계성에서 강점으로 발휘된다.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각자 가진 재능과 필살기가 다르듯 어떤 사람에게는 외모가 재능인 세상이기 때문이다)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다양한 아이덴티티를 가졌을 때 자신의 다른 재능으로 어필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외모로 인해 내 재능이 부풀어 보이지는 않을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거 아닐까 하는 걱정 또한 가질 수 있다. 외모가 내 재능에 +가 될 수도 있지만 -가 되는 상황도 때에 따라서는 가능(물론 +가 월등히 많을 것이다)하다는 말이다. 또한 어떤 아이덴티티가 차지하는 부분이 클 때 그 아이덴티티에 대한 의존성은 커질 수밖에 없고 서서히 그 아이덴티티가 약해질 경우 자아는 흔들린다. 이렇듯 외모는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이루는 요소 중의 하나이며 본인이 그 부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지분을 인정하느냐에 따라서(혹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비주얼 중심사회라는 세파에서 굳건(가끔 흔들릴지언정)할 수 있다.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을 누구나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그렇게 되고 싶어한다. 열심히 살을 빼고, 열심히 피부과를 다니며, 성형도 열심히 한다. 비주얼적 우위가 가져다주는 권력은 달콤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도 전에 외모만 보고 나를 좋아하며 단지 예쁘고 잘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더 챙겨주려 한다. 인간은 아름다움에 대한 본성이 있다. 예쁜 걸 좋아하고 친해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잘 생기고 예쁜 사람을 봤다고 뭔가를 더 주려고 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귀여운 아기와 귀여운 동물들은 케어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귀엽기 때문에 보호해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 진화론적 관점에서 외모가 생존에 유리하게 발현되는 것도 이 지점이다. 비주얼로 호감을 불러일으키면 케어받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성인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케어가 필요없는 사람에게도 굳이 떡 하나 더 챙겨준다. 자발적 유모, 무의식적 무수리가 되고 만다.(조심스럽지만 가스라이팅 역시 이러한 원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외모 권력은 SNS를 통해 인스타 권력으로 넘어갔다. 사람들은 필터를 통해 걸러진 비주얼에 반해 팔로우를 하고 일거수 일투족을 구경?한다. 동일한(결핍된) 욕망 체계를 가진 사람들을 공략하는 것이 마케팅의 비법이다. 돈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외모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외모를 보여주면서 '너도 할 수 있쒀!'라고 자극한다. 적정한 욕망은 삶을 잘 살게 하는 동기부여가 되지만 나와 그 사람의 차이를 인지하지 않은 맹목적 동일시는 구멍난 항아리에 물을 들이붓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될 수 있나요?'를 끊임없이 묻지만 '너도 할 수 있쒀'라는 말 뒤에 '너는 결코 나처럼 될 수 없어'라는 진실이 당사자에겐 잘 보이지 않는다.
외모 권력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결국 외모가 훌륭한 사람이 아닌, 훌륭한 외모가 사회적으로 우위에 위치할 수 있도록 뽐뿌질하는 미디어와 외모를 떠받드는 대중이다. 외모가 훌륭한 사람은 외모로 인해 얻게 되는 이득을 사양하지 않고 즐기고 잘 이용했을 뿐이다. 외모가 중요한 사회인 것은 맞지만 외모가 다르게 생긴 A, B, C가 아닌, 잘생긴 A, 못생긴 B, 그리고 나 이런 식으로의 구분은 외모로써 등급을 구분짓고 나 역시 그 등급으로 구겨넣는 의식체계를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식체계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상위 등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친다. 비주얼 중심사회에서 외모가 가지는 영향력은 적지 않다. 하지만 예쁘고 잘 생긴 외모의 누군가에게 이유없는 호의를 베푼다면 비주얼 중심사회에 종속됨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다. 태어날 때부터 무수리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수리가 아닌 나로 살기를 바란다. 나도. 너도.
글쓴이 이문연
옷생활 경영 코치
문제적 옷생활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