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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문연 Nov 23. 2017

50가지 사소한 글쓰기(32) 죽음(내가 죽으면)

몇 살까지 살고 싶으세요?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 지인이 나중에 쓰고 싶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에세이인데 '나의 죽음을 이들에게 알려다오' 이런 제목의 책이었다. 자신의 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는데 난 죽고 난 후 지인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지인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라는 컨셉으로 이해하고 '아 그럼 죽기 전에 죽었다는 것 가정하고 쓰는 건가요?'하고 물었더니 '아뇨, 죽은 후에 전달되는 책이에요.'라고 했다. '그런데 지인이 먼저 죽으면 어떻게 해요?'라고 물으니 '그런 변수는 생각하지 못했네요. 그럼 제가 죽기 전에 죽었다는 걸 가정하고 주는 걸로.'라고 전달 시점을 수정했다. 10대 때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자살에 대한 생각은 많이 했지만 그건 자의에 의한 삶의 종료라는 의미에서 죽음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는 시기는 '꺾이는 시기(평균 수명의 반)'가 아닐까 하는데 그 때가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퇴화되고 있음'을 실감하기 때문은 아닐런지. 그래서 원래 죽음이라는 주제는 혼자하는 글쓰기(5)권에 삽입 예정이었는데 이번에 써보고자 한다. (5)권에는 II로 들어가도 나쁘지 않으니까.


에피소드(1) 몇 살까지 살고 싶으세요?


현재 나이 37살. 80까지 산다고 했을 때 이제 거의 반 정도 살았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이 120세까지 살 날이 머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나는 아무리 의학 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100세를 넘어서 사는 것에는 좀 회의적이다. 나에게는 '얼마나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100살을 넘어서 살고 싶지는 않다. 나이 들어서 몰입하고, 즐길 수 있는 무언가가 금전적인 어려움없이(생계유지는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동반되어야 하루를 더 살아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 것 같다. 시니어 일자리가 더 많이 생기고 시니어들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일에서도 찾을 수 있을 때 추운 겨울 날 포스터를 붙이기 위해 돌아다니는 것이 아닌, 적어도 따뜻한 공간에서 일할 수 있어야 평균 수명의 연장은 의미가 있다. '죽지 못해 산다'라는 슬픈 말이 나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런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리는 사회에서 사는 것도 내가 원하는 미래는 아니다. 


에피소드(2)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가.


루시드 폴은 <모든 삶은 작고 크다>라는 책을 소개하는 인터뷰에서 '그냥 말수가 좀 적고 좀 멍청하고, 그러면서도 귀여운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봤는데 어떤 사고를 당하지 않는 이상 할머니를 거쳐 죽음에 이를텐데 나는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했으니 엄청난 시간 건너뛰기를 한 셈이다. 그러니 생각해보자. 난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가. 일단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나의 최애 아이템인 청바지를 나이가 들었다고 못 입는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손녀(결혼부터 쫌...)와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한 열린 사고(지금부터 쫌...)의 소유자였으면 좋겠다. 몰입할 수 있는 공부와 취미 하나씩 가지고 남편 할아버지와 손 잡고 산책이 가능한 일말의 로맨틱함(다시 태어날래?)을 간직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 써놓고 보니 좀 많이 이상적이긴 하지만 꿈은 크게 가지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되고 싶은 할머니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엉뚱한 할머니'(앞의 이야기와 연관성 제로)이고 싶다. 


에피소드(3) 내가 죽으면


나는 아직 건강하고 나이도 젊기 때문에 건강상의 이유로 갑자기 죽을 확률은 적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가족이 나의 전부를 다 알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내가 갑자기 죽을 경우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그런 걸 정리해놓으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부고 알림>

내 친구들, 지인들 전화번호는 다 내 핸드폰에 적혀 있다. 그래서 핸드폰이 먹통이 될 경우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어떻게 연락할 수 있을까. 아! 요즘은 페이스북이 잘 되어 있으니까. 페이스북으로 알리면 되겠구나. 내가 없는 내 페이스북에 내 이름으로 태그를 걸어.


<내가 했던 일들>

내가 했던 일들은 거의 내가 직접했던 일이라 아마 뒷처리가 더없이 깔끔?하지 않을까 한다. 내가 연락을 안 받으면 당연히 코칭을 그만뒀거나, 일을 접었거나 생각할테니까 말이다. 내가 썼던 글만이 인터넷에서 나의 존재를 알리겠지. 난 네이버 인물 사전(원래 저자들은 신청하면 올려주는데 난 신청하지 않았다)에도 안 올라가 있으니 거기 사망 년월일이 공개될 일도 없다. 디지털 장의사를 쓸 필요가 있을까? 인생의 어떤 시점에 어떤 부분을 지우고 싶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떠올렸을 때 특별히 떠오르는 건 없으니 디지털 장의사에 들어갈 돈은 굳었다.(지금은)


<집 정리>

집을 사서 살고 있지는 않을 것 같고, 아마 세입자가 죽었을 때 법적인 처리 사항이 있을 것이다. 부모님이 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고. 언니나 여동생 혹은 남동생이 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난 죽었으니 얼마 안 되는 재산은 (내가 솔로였다는 전제하에) 결혼한 언니를 제외한 여동생과 남동생에게 주고 싶다. 


<짐 정리>

고인의 짐은 아마 다 태우지 않을까 싶다. 짐도 별로 없으니 쓸 만한 건 필요한데 기부해주고, 필요없는 건 알아서 버려주길. 나와 함께 태워주길 바라는 아이템은 나의 보물 1호 노트북과 외장하드는 나와 함께 태워주오. 하늘에 가서도 갖고 놀게. 죽음을 생각하면 짐이 별로 없는 게 좋을 거라는 말이 이런 거구나. 하나하나씩 생각하며 처분?을 결정하려니 이것도 결정장애자들(물론 죽기 전에 자기가 정한다는 전제하에)에게는 죽을 맛이겠구나. 나는 짐도 별로 없고 결정장애자보다는 결정선호자에 가까워서 아주 쉽게 클리어!


<장례식>

결혼을 해보지 않았지만 결혼을 한다면 결혼식을 아주 소박하게 가족끼리만 모여 하고 싶은 게 현재 나의 소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례식도 별로 크게 하고 싶지는 않은데 나의 이런 바램이 죽어서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난 이미 죽었기 때문에 장례식을 어떻게 치루든 '절차'는 상관없지만 '내용'은 좀 달랐으면 한다. 시체를 화장만 할 수는 없나? 왠지 화장을 해야되기 때문에 장례식장을 '어쩔 수 없이' 이용한다는 느낌이 드는데 만약 화장만 따로 할 수 있다면 화장만 따로 해서 장례식은 그냥 홈웨딩처럼 작은 장소에서 하고 싶다. 장례한다고 하면 누가 장소를 빌려줄까 싶기도 하지만 셀프 웨딩처럼 이제 장례도 셀프 장례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예측해본다. 또한 앞으로의 장례 문화는 슬프기만 한 것에서 우리도 조금은 더 죽은자?의 입맛에 맞게, 유서에 따라 다양하게 연출?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남는 자들은 슬프겠지만 죽음이 생을 대신할 수 없기에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은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일상을 정지시키는 덩어리진 슬픔이 아닌, 일상 속에서 옅어지는 슬픔이었으면 한다. '무뇽씨의 마지막은 참 OOO했어'(누구나 하는 똑같은 장례로는 표현하기가 참 애매할 수 있으니)로 기억될 수 있다면, 그것만큼 만족스러운 fin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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