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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문연 Feb 25. 2016

50가지 사소한 글쓰기 워크북(8) 형제자매

형제자매에 대한 추억을 소환하다.

에피소드(8) 형제자매님들


'미친년~~~!!' 아파트 공터에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말빨로 이기지 못하니 그 화가 욕으로 나온 것이다. 여우같은 동생은 그걸 또 꼬투리잡아 '엄마한테 이른다며' 나의 약점을 잡아 결국 내 머리에 백기를 꽂았다. 뭣때문에 싸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미친년이라고 했던 것과 동생이 엄마 카드를 쓴 것은 또렷이 기억난다. 딱따구리처럼 쏘아대는 것이 분해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지만 아마 '엄마 카드'를 쓰리라 예상했다면 결코 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3명의 자매 중에 키는 제일 컸지만 똑소리나는 언니때문인지 나는 살짝 무디게 자랐다. 2살 터울인 언니와 1살 터울인 여동생.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을 때) 3명의 딸을 골고루 잘 키우고 싶으셨을 거다. 


언니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책도 많이 읽고(읽고 싶은 책을 사달라고 할 정도였다니!) 1km 거리의 미술학원도 혼자 잘 다녔을 정도로 똑순이로써의 자질을 보였는데 나는 세제 심부름도 잘 못했다. 우리 집은 아파트 4층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아파트에서 내려오면 바로 슈퍼가 있었다. 엄마가 돈을 쥐어주며 어떤 세제를 사오라고 하면 난 슈퍼에 가서 세제들을 보고만 있었다. 그러면 슈퍼 아줌마가 우리 집에 전화를 해(그 시절엔 다 알고 지내는 이웃사촌) 자초지종을 물었고 나는 심부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아마 5살쯤이 아니었을까. 세제 이름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까먹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세제 앞에서 묵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동생은 친한 친구이자 웬수였다. 1살 터울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미술학원(유치원 대신 다녔다), 초등학교, 온갖 학원 등을 같이 다니다 보니(언니는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섬세함과 예민함의 소유자였으므로 같이 놀 수 없었다.) 친구화 되었다. 한 번은 부모님께서 롤러 블레이드를 사주신 적이 있었다. 그 날도 재미있게 놀고 모래 놀이를 하기 위해 계단 1층에 잠깐 숨겨뒀는데 누가 그걸 훔쳐간 것이다. 아마 사주신지 3개월도 채 안 됐던 것 같다. 롤러 블레이드 두 쌍은 꽤 비쌌기 때문에 엄마, 아빠한테 정말 무지막지하게 혼났다. 같이 놀 때도 많고, 서로 싸울 때도 많았는데 같이 혼날 때도 많았으므로 여동생과는 공유되는 추억이 더 많은 것 같다. 가끔 우리는 쌍쌍바처럼 언니를 쫓아다니곤 했는데 언니는 참 싫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녀의 반에 우리가 찾아가는 것도 싫어했다. 


내가 10살, 3학년이 되던 해 엄마는 막둥이를 낳으셨다. 그래서 3자매였던 우리는 4남매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3명의 딸들이 육아에 참여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산부인과에 가서 빨갛고 못생긴 갓난 아기를 보는 것이 그 때는 왜 그렇게 좋았는지 학교가 끝나면 바로 산부인과에 가곤 했다. 막내 아들의 뒷바라지는 거의 여동생이 담당했는데 먹이고, 씻기고, 기저귀 갈고, 재우는 것을 어디서 배워온 것마냥 처리했다. 난 그저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진담반 농담반으로 남동생에게 막내 누나가 다 키웠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지지고 볶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는데 30살이 넘어가니까 형제자매가 많은 게 참 좋은 것 같다. 4명이 모두 다 다르지만 그 다름을 인정함에서 오는 여유가 이제야! 좀 생긴 것 같고 그들의 성장을 보면서 좋은 자극을 받기도 한다. 그들의 눈에 나는 어떤 형제자매일까. 언니의 결혼과 막내 동생의 대학교 졸업. 그리고 여동생의 해외로의 이직. 나도 올해에 뭐라도 해야겠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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